올해 2월 말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간통죄가 62년 만에 사라졌지만, 이런 역사적인 판결 이후에도 혼인과 이혼 풍조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간통죄 폐지 후 바람피우는 배우자가 늘고 '적반하장' 격으로 이들이 내는 이혼 소송이 증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아직 별다른 변화는 없다.
오히려 간통죄 폐지보다는 대법원에 계류된 이혼 소송의 파탄주의 인정 여부가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파탄주의는 현실적으로 혼인 관계가 깨졌다면 이혼을 인정하는 법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현행법은 그 반대인 유책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바람을 피운 배우자는 잘못이 없는 배우자를 상대로 이혼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 "간통죄 폐지 후 달라진 게 없네요"
가정법원 판사와 이혼 전문 변호사, 흥신소 사장 등 이혼 소송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모두 간통죄 폐지 후 달라진 게 없다고 전한다.
특히 바람을 피운 이들이 잘못 없는 배우자를 상대로 내는 이혼소송은 통계로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소송이 늘었다는 정황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고 법조계 관계자들은 말한다.
서울가정법원 장진영 공보관은 "부정행위를 하는 등 혼인관계 파탄에 책임이 있는 쪽이 이혼 소송을 내 받아들여진 경우는 아직 없다"며 "간통죄 폐지 이후 이런 소송이 늘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고 이런 소송의 결과는 여전히 모두 원고 패소 판결로 나왔다"고 말했다.
간통죄 폐지로 이혼 소송이 늘었다면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웃어야 하지만, 이들 역시 딱히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정법원 판사 출신인 이현곤 변호사는 "부정행위를 저지른 쪽이 이혼 소송을 내고 싶다며 문의를 해오는 경우는 가끔 있지만, 승소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를 해주면 거의 단념한다"며 "이들은 곧 파탄주의가 도입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혼외 불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간통죄 폐지로 형사처벌의 걱정을 덜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유책주의 판례가 뒤집히지 않은 상황에서 패소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섣불리 이혼 소송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우자들의 행적 조사를 대신해주는 흥신소 업계도 울상이다.
간통죄 폐지에 상관없이 부정행위를 입증하기 위해 미행을 하면서 숙박업소에 함께 들어가는 사진 등을 증거로 남겨주는 업무 방식은 변함이 없지만, 간통죄 폐지 이후 이런 조사를 맡기는 의뢰 자체가 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흥신소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올해는 상반기부터 메르스 사태에 북한 포격 등 불안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경기가 위축돼 그런지 개인 조사 의뢰가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다"며 "바람을 피우든, 배우자 뒷조사를 하든 다 먹고살 만해야 생각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 위자료도 그대로…파탄주의 도입한다면 개선 필요 지적
간통을 한 배우자에게 형사 처벌 대신 경제적인 징벌로 위자료 배상액을 늘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컸지만, 아직 제도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혼과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러 혼인 파탄의 일방적인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위자료 지급액은 여전히 최대 3천만원 수준으로 결정되고 있다.
또 이혼 소송이 서로 온갖 잘못을 들춰내는 진흙탕 싸움이 되기 일쑤여서 부정행위를 한 배우자라 해도 일방적인 책임을 지고 위자료를 부담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위자료를 높여야 한다는 법조계 안팎의 지적이 나오자 판사들 역시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만, 아직은 신중론이 우세하다.
올해 6월 말 전국 가정법원과 지방·고등법원의 가사·소년 재판 담당 법관 43명이 모여 연 포럼에서는 이혼 재판에 다양한 변수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위자료 기준을 높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앞으로 유책주의가 깨지고 파탄주의가 본격 도입되면 이혼으로 피해를 보는 쪽이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계적으로도 파탄주의가 대세이지만, 상대방에게 재정적 고통을 주거나 자녀의 이익을 위해 혼인을 유지할 필요가 있으면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가혹조항'을 두고 있다. 또 이혼 후에도 부양료를 정기적으로 지급하도록 보호 장치를 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간통죄 폐지만으로는 이혼 풍조에 아직 큰 변화가 없지만, 파탄주의 도입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오면서 혼인의 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진 게 사실"이라며 "현실에 맞게 법을 바꾸더라도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는 반드시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