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칼럼] 박근혜 정부의 빈자리

입력 2015-08-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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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우리말 표기는 참 어렵다. 맞춤법 띄어쓰기를 열심히 익히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다. 가령 첫사랑 첫발 첫눈 첫인상 이런 것들은 다 붙여 쓴다. 하나의 단어로 굳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빈자리 빈집 빈산 빈손 빈숲 빈칸 빈주먹 빈껍데기도 붙여서 쓴다. 그러나 빈 몸, 빈 수레, 빈 의자는 띄어 써야 한다.

비어 있어 뭔가를 채워야 제 모습을 얻게 된다는 뜻일 텐데도 어느 것은 복합어이고, 어느 것은 왜 아닌지 알기가 참 어렵다. 박근혜 정부에는 빈자리가 많고 빈 의자도 많다. 붙여야 되는지 띄어야 되는지 알 수 없는 국정의 혼란 속에서 빈 수레는 오늘도 요란하다.

메르스 때문에 국민들이 두 달 이상 큰 불안과 불편, 고통을 겪었지만, 초기 대응 실패의 원인으로는 총리의 부재도 꼽을 수 있다. 개인의 능력과 자질에 관계없이 누구든 총리가 제자리에 좌정해 있었다면 정부의 메르스 대응과 관리가 조금은 더 나았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완구 전 총리의 사표를 수리한 지 24일 만에야 황교안 법무장관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고, 그는 또 인사청문회가 끝난 뒤인 13일, 총리 후보로 지명된 지 24일 만에야 장관직 사표를 냈고 6월 18일 총리로 취임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래 ‘늑장 인사’는 이제 일상사 다반사가 됐다. 총리와 장관은 물론 공공기관장, 일선 부처의 국·과장까지 몇 달째 공석으로 두거나 후임이 정해지지 않아 임기를 넘겨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사혁신처까지 만들어 운영하는 정부가 왜 이런지 알 수 없다.

문화부의 가장 큰 공공기관인 한국관광공사는 4월 이후 사장이 공석이어서 대행 체제로 운영되다 10일에야 정창수 전 국토부 차관이 사장으로 임명됐다. 문화부는 변추석 전 사장이 건강 등의 사유로 사직했다고 밝혔지만, 그대로 믿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문화부와의 갈등설이 퍼지기도 했다. 올해 가장 큰 행사라는 밀라노 엑스포의 ‘한국관광대전’은 수장도 없이 치러졌다.

1순위 후보자로 올라간 공직 임용대상자를 무슨 이유인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임명을 거부하고 적격자가 없다며 재공모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국립 현대미술관장의 경우 문화부는 올해 1월부터 4개월간 진행한 공모에서 후보자를 2명으로 좁혔으나 적격자가 없다며 6월에 재공모 방침을 밝혔다. 그러자 서울대 출신 유력 후보자에게 사퇴를 종용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문화부는 8월 20일을 기한으로 희망자를 온라인 접수하고 있는데, 관장 자리는 9개월째 공석이다. 홍익대 출신인 김종덕 장관 취임 후 영화진흥위원장과 위원, 한국저작권위원장,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문화창조원 예술감독 등에 잇따라 홍익대 출신이 선정돼 왔다.

국립대학인 공주대는 지난해 7월, 방송통신대는 9월, 경북대는 12월에 학교에서 추천한 총장 후보자들이 교육부로부터 ‘구체적 사유’ 없이 임명을 거부당했다. 교육부가 이들 대학에 보낸 공문서에는 “교육공무원 인사위원회 심의 결과, 총장으로 부적합하다”는 말만 쓰여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교통대 한체대 공주대 방송통신대 경북대 등 5개 국립대의 총장 임용 제청을 7회나 거부했다. 그런데 최근 임용된 모 국립대 총장의 경우 논문 40여 편의 중복게재 의혹과 연구비 부정 수령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아무 문제없이 일하고 있다. 앞뒤가 안 맞고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다.

이렇게 각종 자리를 제때 채우지 않거나 편파적인 인사가 거듭되면 정부가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 공무원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 수시로 ‘무두절(無頭節)’ 휴가를 하는 세종시 공무원들의 근무행태는 휴가철인 요즘 더 느슨해졌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 경제 대도약 대국민담화를 통해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이렇게 공직사회의 질서를 망가뜨리고 갈등을 조장하면서 경제개혁을 부르짖고 문화융성을 강조해 봐야 실효가 있을까. 경제개혁이든 문화융성이든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국민 대다수가 생각하는 공직 인선의 질서를 존중하고 공감을 얻지 못하는 한 대통령은 혼자서 이쪽 마을이 아닌 엉뚱한 마을을 향해 외치는 모양새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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