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취업 시장의 인문학 바람… 철학은 있는가

입력 2015-04-1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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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운 산업부장

‘인문학(人文學)’ 전성시대란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대기업들의 채용 트렌드는 인문학이라는 단어로 명확하게 요약된다. 지난해부터 각 그룹과 기업의 최고경영인(CEO)들은 인문학의 소양을 갖춘 인재의 중요성을 전파하는 데 너도 나도 직접 나서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중심으로 한 학문영역을 뜻한다. 분야 역시 광범위하다. 언어를 포함한 역사와 철학은 물론, 아직 해석의 여지는 남아있지만 문학 등 예술까지 인간의 가치 탐구와 표현 활동 각 분야를 망라한다.

제조업 중심의 국내 산업계가 기술적인 전문지식을 넘어 인문적인 영역까지 아우르는 인재들 등용에 나서는 것은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과연 기업들은 진짜로 인문학적인 소양을 중요시할까?

요즘 만나본 기업 관계자들 중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했다. “제조업이 기반이다 보니 아무래도 이공계열을 뽑은 뒤, 이들에게 기획이나 다른 업무를 맡기는 것이 인문계열을 뽑는 것보다 사업 전반적인 이해도 면에서 더 효율적이다.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에 치우친 인재보다는 인문학에 다소 이해도가 있는 사람들이 좋다고 본다.”

과연 이것이 ‘정답’일까. 20여년 전 취재차 필립스 본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동행한 현지 매니저는 회사의 인재 채용과 관련, “필립스 개발 파트에는 기술 개발자 외에도 많은 수의 역사학자, 언어학자, 심리학자 등 인문학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전자제품을 개발하면서 왜 역사학자가 필요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도구는 역사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 현재의 도구는 바로 전자제품인 만큼 이 역시 사람에 대한 이해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구체적인 개발 작업은 휴먼팩터(human factor)를 기반으로 산업공학 전공자들이 맡지만, 역사학자, 언어학자들은 버튼의 개수와 위치, 동작 LED의 위치와 색상, 표기 방법, 장소별 조명의 색온도, 사용설명서 제작까지 모든 부분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

반면, 우리나라 기업의 인문학 바람은 인력 배치의 효율과 편의성을 우선하고 있다. 물론 국내 산업구조는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이공계의 비중이 크며 선호도 역시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업이 인문학을 통한 또 한 번의 혁신을 원한다면, 취업을 위해 급조된 인문학 소양의 이공계열을 쓰는 게 아니라 역사학과 국문학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인문계열을 뽑아야 하는 것이 정답이다.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대학 인문계열 졸업생의 취업률은 1995년 62.6%에서 지난해 45.9%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인문계 출신들이 대기업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다. 아예 인문계 출신을 뽑지 않는 곳도 많다. 속칭 ‘SKY’를 나와도 인문계열은 높은 취업 문턱에 발이 걸려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서울대 인문사회계열 졸업생의 취업률은 59.1%로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인재 수요의 쏠림 현상은 기업을 떠나 국가적인 손해로 직결되고 있다.

게다가 올해 30대 그룹의 신규 고용은 지난해보다 10% 더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삼성이나 현대차 등 안정적으로 보이는 취업자리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주말에도 11만명의 응시자가 두 그룹의 인적성 시험장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시험장 마련부터 벅찬 상황인 만큼 응시자들이 정말 기업에서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변별하는 것은 더 힘들다.

공식적인 청년실업률은 11.1%지만, 다양한 불완전 취업상태(아르바이트, 프리랜서 등)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까지 감안한 ‘체감 청년실업률’은 무려 22.9~37.5%에 달한다. 이는 100만명에서 150만명에 달하는 숫자로 IMF 외환위기 시절인 1999년 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대기업의 인문학 바람은 왜 불어온 것일까. 인문학과 산업의 결합을 통한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몰려드는 취업준비생 중 더 쓸 만한 이공계열을 보다 ‘쉽게’ 가려내기 위한 것인가.

보다 본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업들이 명확한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인문학 바람은 한 때의 유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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