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vo Life Interview] 비극 인생 소년, 희극 인생 노년이 되다 - ‘기부천사’ 황규열 씨(73)

입력 2015-03-27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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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어머니와 동생 잃어

▲황규열씨가 자신의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에 있는 자신의 논 앞에서 환한 웃음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양용비 기자 dragonfly@

어머니의 팔이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다친 어머니는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 팔이 점점 썩어 들어가다 끝내 하늘의 별이 됐다. 그 때 소년의 나이 7세. 가난이라는 참혹한 공포를 배웠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잠을 청한 동생의 몸에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동생을 부둥켜안은 아버지가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 때 그 소년의 나이 8세. 굶주림의 비참한 최후를 배웠다.

이듬해 새어머니를 맞이했지만 궁핍한 삶은 여전했다. 이복동생 또한 굶주림으로 세상을 떠났고, 6·25 전쟁은 그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남의 집 부엌을 내 집같이 드나들며 훔쳐 먹기 일쑤였다. 가난은 학업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학업을 중단한 나이 17세. 사회의 혹독함을 배우기 시작한다. 인생의 세 가지 쓴맛을 20세 이전에 배운 어린 소년은 다짐한다.

“내가 어른이 되면 꼭 항아리 한 가득 쌀을 채워놓고 살 거야!”

그로부터 강산이 약 여섯 번 변했다. 남의 밥을 훔쳐 먹던 소년. 눈앞에서 비극을 지켜봐야 했던 소년은 백발의 할아버지가 됐다. 이제는 밥을 굶을 걱정도 하루를 연명해야 할 걱정도 없다. 그의 다짐처럼 항아리 속에 쌀은 이미 채워지다 못해 넘치고 있다. 그래서 그가 한마디 한다.

“이제 항아리는 다 채워졌으니 내 꿈 이룬 것 아니오? 나도 이제 멋있게 살아봅시다.”

드라마 같은 인생, 진짜 멋있는 삶의 주인공은 황규열(73)씨다.

◇ “저런 것이 사람 노릇을 하고 살면, 사람에게 밟혀 죽을 것”

황씨가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에게 들은 말이다. 남들이 본 그의 몰골은 아사(餓死) 직전 이었던 것이다. 집에서는 털어도 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남의 집 밥을 훔쳐 먹어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은 그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업을 이어가는 것은 사치였다. 자연스럽게 학업도 중학교에서 중퇴했다. 이제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연명이라는 말이 그의 유년시절을 표현하기 적합하다. 살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중학교를 중퇴한 17세부터 몸을 혹사시켜 오로지 돈을 위해 살았다.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고, 동네 저수지 근처에서 품도 팔아 생계를 근근이 이어나갔다.

악착같이 벌었다. 품을 팔아 번 돈으로 소 한 마리. 또 그 소를 팔아 논 3마지기를 살 수 있었다. 아버지께 물려받은 땅을 합치니 총 14마지기나 됐다. 그러나 그곳은 농사를 짓기엔 토질이 너무 좋지 않았다. 오로지 호밀이라는 곡식밖에 심을 수 없었다. 땀으로 힘으로 그 토지를 뒤엎는 수밖에 없었다. 갈고, 엎고, 뒤집어 마침내 벼를 심을 수 있는 땅을 만들었다. 진정한 농부 인생의 시작이었다.

▲용인시와 백암면에서 기부에 대한 감사로 상을 받고 있는 황규열씨(맨위). 양용비 기자 dragonfly@

◇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사유피 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처럼 이제는 제 인생도 멋있게 살고 싶었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돈은 죽으면 없어지는 것이에요. 없어질 바에 어려운 사람에게 베풀고 세상에 이름 한 번 남겨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넉넉하진 않지만 밥을 곯을 걱정도, 가난을 걱정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저 평범한 농부로서 살아오던 황씨였다. 그러나 평범한 그에게 비범한 일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때는 1991년 경기 용인시 백암면 시내에서 중학생 시절 벗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한 친구가 장학회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한다. 모두들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황씨는 긍정적이다 못해 적극적이었다.

“91년 장학회를 만든 해에 아내와 옥신각신한 끝에 쌀 10가마니를 기부했어요. 당시 한 가마니에 5만원 정도 했으니까. 약 50만원 정도 되는 셈이죠.”

첫 걸음이 힘들지 그 다음 기부부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지는 않은 액수지만 꾸준히 용인시에 온정을 베풀었다. 91년부터 2011년까지 꾸준히 기부한 액수만 200만원. 그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더 큰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실현할 시기는 자신의 나이 칠순 때라고 생각했다.

“‘칠순이니까 7000만원을 기부해야지’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아내를 설득하고 옥신각신한 끝에 그해 1월 5천만원을 기부했어요. 진짜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 못하지. 그 때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아! 이제야 내가 사람노릇을 하고 사는구나’. 그렇게 큰 액수 기부하니 더 욕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 달 쌀 백 가마니를 용인시민장학회에 더 기부했죠. 한 500만원 정도 될 거에요. 이만하면 으리으리한 칠순잔치 한 것 아니요?”

황씨는 1년 내내 농사를 지어 얻는 쌀 수확량이 100가마니가 채 안된다고 설명했다. 결국 1년 농사치를 모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뜻 내놓은 셈이다. 이러한 행동에 아내도 처음에는 만류가 심했지만,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식이다. 2012년 아내의 칠순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괴짜(?) 기부가’답게 아내의 칠순을 백암면에 쌀 100포대 기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황씨는 멋쩍은 듯 아내에 대해 얘기한다. “이제는 여기저기서 고맙다고 전화도 오고 하니까, 집사람도 좋아하는 눈치야. 정말 후회 없는 일 한 것 같아요. 잔치는 못해줬지만, 그만큼 인생에 남을 이벤트 해줬으니 멋있는 남자 맞죠?”

▲▲유년시절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일어서 노년에 기부로 온정을 베풀고 있는 황규열씨. 양용비 기자 dragonfly@

◇ 내 고향을 위해 평생 봉사하는 것이 꿈

황씨는 백암면의 슈퍼스타다. 동네 곳곳마다 그의 선행에 경의를 표하는 플랜카드로 가득하다. 또 쌀을 정미소에 맡기면 그를 알아보고 포대값은 받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황씨는 그것 하나하나가 부끄럽다. 그저 자신이 뜻 깊은 인생을 살기 위한 행동 이었다고 생각해서다.

“삶을 살아보니 돈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 같아요. 물론 나누면 더 좋고. 그래서 내 고향 용인에서 평생 봉사하는 것이 꿈입니다. 이제는 봉사의 재미에 맛 들려서 빠져 나올 수도 없어요.(웃음)”

누구나 멋있는 삶을 꿈꾼다. 고난의 유년 시절을 보냈던 황씨가 선택한 멋있는 삶의 방법은 기부였다. 자신과 같은 유년시절을 보내는 젊은이들이 없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는 멋있게 늙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결코 원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것이다.

“멋있게 늙는 것이요? 하하. 두 가지 같아요. 자식에게 위대해 보이는 것. 그리고 남에게 욕을 먹지 않는 것. 그것이 멋있게 늙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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