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은 왜 역적으로 내몰렸나 [오상민의 스포츠 인물사]

입력 2015-03-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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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럽 축구 무대를 밟은 차범근. 그러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실패로 여론재팬 희생양이 됐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내몰린 그는 한국 축구의 슬픈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 하고 있다. (뉴시스)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파상 공격이 이어졌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걷어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필사적인 방어에도 한계가 있었다. 실점 또 실점. 스코어보드엔 0-5란 숫자가 선명했다. 더 이상의 실점 없이 경기가 끝나기만을 바랬다.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한국과 네덜란드의 경기 장면이다. 당시 한국 대표팀 감독이던 차범근은 이 경기를 끝으로 경질됐다. 영웅에서 역적으로 내몰린 그는 여론재판의 희생양이었다.

차범근만큼 굴곡진 축구인생이 또 있을까. 그는 국내 처음으로 유럽 리드를 경험했다. 1978년 독일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로 이적한 차범근은 이듬해인 1979년 프랑크푸르트로 스카우트되면서 갈색폭격기’의 거친 날개를 드러냈다. 1980년 유럽축구연맹(UEFA)컵과 1981년 DFB-포칼 우승 감동을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하면서 46골(122경기)을 기록했다.

1983년엔 레버쿠젠에서 둥지를 틀고 UEFA컵 우승(1988년)을 안겼다. 차범근은 이 우승으로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경험한 아홉 번째 선수가 됐다. 레버쿠젠에서 185경기를 뛴 차범근은 52골을 넣으며 자신의 축구인생 정점을 찍었다.

1989년 현역 은퇴까지 통산 121골을 넣은 차범근은 리그에서만 98골을 기록하며 빌리 립펜스(네덜란드)가 보유한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골 기록(92골)을 경신했다. 이 기록은 1999년 스테판 샤퓌자(스위스)가 106골로 경신할 때까지 10년간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갈색폭격기’ 차범근이 선수로서 무결점 고공비행을 마치고 지도자로 변신한 건 199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K리그 울산 현대 사령탑을 맡아 1991년 준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이후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났다. 그런 차범근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대표팀을 이끌던 박종환 감독이 아시안컵 참패로 경질을 당하자 차범근이 대표팀 감독 물망에 오른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의 풍부한 경험과 데이터 분석을 융합시켜 전에 없던 축구를 선보였다. 특히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일본과의 3차전은 한국 축구사에 지워지지 않을 명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차범근호’는 그렇게 프랑스로 향했다.

하지만 ‘차범근호’ 신드롬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 멕시코에 1-3 역전패에 이어 네덜란드에 0-5로 완패당하며 영웅에서 역적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17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를 역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비록 대표팀 감독으로서 월드컵 기간 중 경질이라는 비극적 현실은 피할 수 없었지만 축구협회 및 기술위원회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도 소신 있는 축구인생 외길을 걸었다. 무엇보다 차범근 축구교실과 차범근 축구상을 통해 수많은 유망주를 축구선수ㆍ지도자로 육성·발굴하며 한국 축구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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