섀도보팅제 3년 연장 조건 올해만 181개사 전자투표 결정… 소액주주 목소리 한층 커질 듯
섀도보팅제도 폐지가 조건부로 3년간 유예된 가운데 이를 유지하려는 기업들이 앞다퉈 전자투표제를 도입하고 있다. ‘주주 없는 주주총회’라는 비판을 받던 주총 풍경에 변화가 생길지 관심이 쏠린다.
◇섀도보팅제 못 놓는 기업… 울며 겨자 먹기 전자주총 도입 = 3일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달 23일을 기준으로 총 260개 기업이 전자투표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만 181개사가 전자주총을 결정했다. 최근 하루 평균 전자투표 및 전자위임장 계약 체결 건수는 약 15건에 달한다.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예탁결제원과 전자주총 계약을 맺은 기업수가 79개사(누적 기준)였던 것과 비교하면 4배 가까운 성장세다.
기업들이 급격히 전자주총으로 방향을 선회한 데는 정부와 국회의 강력한 압박이 한몫을 했다.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지난 1월 폐지될 예정이었던 섀도보팅제는 조건부로 2017년까지 연장됐다. 섀도보팅제를 3년이나마 더 이용하려는 기업은 전자투표와 전자위임장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기업들의 볼멘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미참석 주주들의 의결권을 참석 주주들의 의안 투표 비율에 그대로 적용하던 섀도보팅제가 폐지되면 원활한 주총 운영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다. 그간 손쉽게 주총 정족수를 채우는 것은 물론 경영진의 입맛대로 안건을 상정하고 통과시키기 힘들어진다. 일부 상장사들은 주총 무산은 물론이고, 감사위원회의 법적 요건이 까다로운 경우 상장폐지도 가능하다는 우려를 제기하며 주총 관련 법률 완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주권리를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섀도보팅제 폐지에는 이론이 없다. 다만 현실적인 문제는 남는다. 폐지 유예를 주장하는 측은 소액주주들의 ‘무관심’으로 주총이 마비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관심은 1991년 섀도보팅제가 등장한 후 약 24년간 서서히 쌓여온 것이다. 섀도보팅제 덕분에 회사는 주주총회 날짜나 장소를 잡는 사소한 일부터 감사를 선임하고 의안을 결정하는 중대한 부분까지 소액주주들을 애써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소액주주들은 주총에 참석하더라도 발언권을 얻기 힘든 현실로 인해 ‘구경꾼’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소액주주들이 기업 경영에 관심이 없다고 질책하기 전에 그들을 ‘방관자’로 만든 기업이 먼저 태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주주들이 기업의 주가 등락뿐 아니라 경영 전반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우려를 잠재우면서도 주주들의 권한을 보장하기 위해 주주들이 기업의 주인으로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전자주총뿐 아니라 주총 관련 공시 등이 활성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주주제안 관심도 늘어 = 주주권리에 관한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주주제안은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이슈다. ‘슈퍼개미’로 알려진 손명완 세광 대표가 지난달 12일 자신이 지분 10.6%를 보유한 영화금속에 주주제안서를 발송했다는 소식이 다른 ‘개미’들의 관심을 자극한 것이다.
손 대표는 영화금속에 △현금배당 50원으로 확대(지속적인 배당률 상향) △사외이사 및 감사를 개인주주 대표로 선임 △재무제표 건전성을 위한 자산재평가 △전자투표제 실시 △자사주 소각 등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보냈다. 주주제안 발송 다음날 최동윤 영화금속 대표는 손 대표와 면담을 추진했다. 이 자리에서 최 대표는 주주제안 내용 대부분을 긍정적으로 검토할 방침임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주주제안은 주주가 주주총회에 의제나 의안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다. 국내법상 의결권이 없는 주식을 제외한 발행주식 총수의 3% 이상을 보유한 주주는 주총 개회일 6주 전에 서면으로 안건을 제안할 수 있다. 상장사의 경우 주식 1%(자본금 1000억원 이상 상장사는 0.5%)를 6개월 이상 보유하면 주주제안권이 있다. 그러나 기관투자자가 아닌 개인투자자들이 주주제안 요건에 드는 경우는 사실상 매우 드물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발달로 소수 주주들의 의견 취합은 전보다 많이 쉬워졌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전문가들은 국내 주주제안이 극히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행법상 상장사는 주주총회 일자나 배당 관련 의안을 주총 2주 전에만 발표하면 된다. 반면 주주제안은 주총일자와 안건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6주 전에 먼저 제출하도록 돼 있어 주주제안을 받은 회사 측에 유리한 구조다.
국내 주주제안 횟수는 2013년 36건, 2014년 42건으로 매우 저조하다. 그나마 가결된 제안은 지난해 9건에 그쳤다. 반면 2013년 한해 동안 820건의 주주제안이 쏟아진 미국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 지배구조와 관련한 제안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약 40사당 하나, 미국 S&P1500 기업의 경우 약 3사당 하나의 주주제안이 나왔다. 이 중 절반이 표결에 부쳐졌다.
제안의 다양성 측면에서도 국내 주주제안은 매우 초라한 모습이다. 지난해 국내서 나온 주주제안들은 거의 감사선임, 배당금, 인수합병 등 지배구조 관련 이슈다. 그러나 미국은 전체 주주제안 중 절반에 가까운 내용이 기후변화, 인권, 지속가능성 등 사회·환경과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자투표·주주제안… 주총 풍경 얼마나 바꿀까 = 지난해 6월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회사 지배구조 선진화 방안’에는 사외이사 후보 추천 시 주주제안권의 행사요건을 기존 0.5% 이상에서 0.1% 이상으로 완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최근 KB금융지주가 발표한 최종 사외이사 후보 7인 중 3명이 주주제안에 따라 추천된 인물이다.
주주제안 규정 완화로 실제 주총 풍경이 바뀐 사례다. 전자투표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올해 주총에 더욱 시장 참여자들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제도가 개선돼도 주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전문가는 “미국의 주주제안권은 행사 요건과 절차가 국내보다 훨씬 더 까다롭지만 활발한 주주 참여가 이뤄지고 있다”며 “제도뿐 아니라 주주들의 의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