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1627년(조선 인조 5년) 3월 1일(음력 1월 14일) 3만의 후금(後金) 군사가 압록강을 넘어 침략해왔다. 정묘호란의 시작이다.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에 대해 광해군은 명과의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 없이 지냈으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한 게 화근이었다.
조선은 랴오둥[遼東]을 되찾으려는 명의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머무르게 해 은근히 원조했다. 명을 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으로서는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할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며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했다. 후금군이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쳐들어오자 조선은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맞섰지만 패전을 거듭했다. 인조와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란했다. 후금군은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명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왕자를 인질로 내놓을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했다.
양측은 개전 50여 일 만에 ①화약(和約) 즉시 후금군 철병 ②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③두 나라는 형제국이 될 것 ④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과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골자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었다. 조선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했다.
그러나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척화주전론으로 기울었다. 그 해 겨울 청태종이 침략해왔다. 이것이 조선의 항복이라는 치욕을 부른 병자호란이다. 병자년에 시작돼 이듬해인 정축년에 끝났다 해서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