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그는 유일한 아들이 된 셈이었지만 부왕의 노여움을 산 끝에 뒤주에 갇힌 지 9일 만에 숨졌다. 이 임오화변(壬午禍變·1762년 5월 21일)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치적 처분이라는 견해와 개인적 문제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해석으로 나뉘는데, 어느 한 가지만은 아닐 것이다. 아내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閑中錄)’에서 사도세자가 무서운 아버지를 만나기 싫어하다가 옷 입기를 기피하는 의대증(衣帶症)에 걸렸다고 썼다.
아들이 숨지자 영조는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고 했다. ‘생각할 사, 서러워할 도’다. 영조가 쓴 묘지명(무덤에 함께 묻는 글)에는 ‘오호(嗚呼)’라는 탄식이 열 번은 나온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일흔 살 먹은 애비를 이런 지경에 처하게 하느냐”[爾何心使七十其父遭此境乎]라고 한 대목도 있다.
정조는 즉위한 날 바로 윤음(綸音)을 통해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嗚呼 寡人思悼世子之子也]”라고 선언해 조신들을 아연 긴장케 했다. 이어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세자라는 시호를 올리고,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묘소와 사당도 영우원(永祐園) 경모궁(景慕宮)으로 고쳤다. 그 뒤 묘소는 현륭원(顯隆園·뒤의 융릉)으로 개칭돼 수원부(水原府) 뒷산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수원이 정조의 효심이 서린 ‘효원(孝園)의 도시’로 불리게 된 연유다.
정조는 사후 사도세자의 능에 가까운 건릉(健陵)에 묻혔다.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이 부자의 능을 뭉뚱그려 융건릉(隆健陵)이라고 부른다. 영조의 무덤은 경기 구리시 동구릉의 원릉(元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