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대한민국에서 ‘미생’으로 산다는 것은[배국남의 직격탄]

입력 2014-12-04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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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신드롬의 의미는

▲tvN 드라마 '미생'(사진=CJ E&M)

당신은 상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가족에게도 말 못 한 채 술 한잔 하고 들어온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우는 아이를 떼어놓고 눈물 흘리며 직장으로 향하는 워킹맘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 있는가. 오로지 회사에 살아남기 위해 궂은일 다하며 무시당하는 인턴의 처지를 살펴본 적 있는가. 계약직에서 정규직 전환을 위해 성추행까지 당하다 계약만료 통고로 회사에서 쫓겨난 뒤 자살한 여성의 심경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능력과 실력이 있는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세라인이 없다는 이유로 인사에 밀린 직장인의 비애를 느낀 적이 있는가.

이 질문과 대답이 대한민국 2014년 연말을 강타하는 신드롬을 만들고 있다. 그 신드롬은 이른 아침 출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퇴근 후 술 한잔 하는 포장마차 안에서, 대학가 카페에서, 서점과 안방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웹툰, 만화, 드라마로 네티즌과 독자, 그리고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미생’ 신드롬이다.

종합상사 비정규직 사원 장그래를 중심으로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은 2012년 1월부터 2013년 7월까지 포털 다음을 통해 연재되는 동안 10억 건, 연재 이후 최근까지 1억 건 등 조회건수가 11억 건에 달한다. 웹툰 ‘미생’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012년 9월 1권을 시작으로 2013년 9권으로 완간된 만화책 ‘미생’은 지난 10~11월 두 달 사이 100만 부가 팔리는 경이적인 판매량을 보이는 등 최근까지 200만 부를 돌파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올 출판계에서 유일한 밀리언셀러다. 지난 10월 17일 첫 회를 방송한 드라마 tvN ‘미생’은 케이블 방송임에도 시청률 6%대를 기록하고 관련 기사가 하루에도 수백 개씩 쏟아지고 있다.

대학가 카페에서 인턴을 거쳐 비정규직 신입사원이 된 ‘미생’의 장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남의 일이 아니라고 걱정하는 대학생 모습에서부터 실세 때문에 프로젝트에서 밀려난 오 과장에 대해 격한 공감을 드러내며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직장인의 모습까지 수치로 파악되지 않는 ‘미생’신드롬은 훨씬 뜨겁다. 전문가들은 2014년 올 한해 대중문화의 주목받을 사건이자 키워드는 ‘미생’이라고 단언한다. ‘미생’은 이제 가치 있는 사회경제적 담론이 되고 의미 있는 문화적 신드롬이 되고 있다.

‘미생’신드롬은 2014년 한국에서 미생으로 산다는 것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미생’신드롬은 이 땅의 미생인 직장인, 자영업자, 농부, 취업준비생, 아르바이트생의 고달픈 삶의 문양이기도 하다. 실업자와 취업준비생, 구직단념자 등 사실상의 실업자가 300만 명인 시대다. 일자리와 돈이 없어 연애도, 결혼도, 자식도 포기하는 3포 세대가 급증한다. 누구는 말한다. 3가지만 포기하겠느냐고. 심지어 목숨까지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증가하는 비극적 설명을 덧붙이면서. 또한, 직장인도 불안하고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시도 때도 없이 불어 닥치는 구조조정 칼바람에 해고 위험에 항상 노출되고 있다. 갑(甲)인 회사라는 전쟁터에서, 을(乙)인 직장인들은 때로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존심과 양심마저 내팽긴 채 끝도 없는 생존경쟁을 벌인다. ‘미생’ 대사처럼 직장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니까. 자영업자들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도록 온몸을 받쳐 일했지만 적자만 쌓여가고, 농민들은 하루의 휴가도 없이 땅을 일구지만 한숨만 늘어간다.

그래도 이들 미생의 삶은 가치가 있다. 비록 1% 갑의 눈에는 이 땅의 미생들이 비루하게 보일지라도 이들의 노동과 삶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미생’ 신드롬은 힘든 하루를 견디고 소주 한잔을 털어넣으며 “우리 모두에겐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 “바둑판 위에 의미 없는 돌은 없다”라는 의미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살고 싶은 이 땅의 미생들에 대한 소박한 헌사인지 모른다. 이 땅의 미생들에게“아름다움은 끝내 바닥에 남은 자의 눌러 붙은 허름한 가슴으로부터 왔다”(곽재구 시인의 ‘처제’)와 “어쩔 수 없이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 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이라는 두 시인의 시구와 함께 2014년 대한민국의 미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 것이라는 말을 건네며 소주 한잔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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