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대표 인터뷰
한 우물을 오래 파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한 우물을 파는 일관성은 성공과 실패로 그 결과를 나누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 대표는 소프트뱅크란 이름과 함께 출발한 이후 적어도 지금까지는 외도 없이 벤처투자 한 길을 달려 왔다. 큰 부침(浮沈)도 있었고 작고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켜온 것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문규학 대표가 소프트뱅크 그룹 창업자이자 현재까지도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손정의(孫正義) 회장에 대해 가장 높이 사는 점도 일관성이다.
"소프트뱅크의 비전은 정보통신 혁명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소프트뱅크가 일본 기업이라고 해서 일본인들만 행복하게 하겠다는게 아닙니다. 손정의 회장은 자기가 하는 사업으로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 싶다는 비전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기업가로서 구체적인 목표들을 단계별로 세워두고 있습니다. 몇 년 후에는 기업가치를 얼마로 키워놓겠다, 어느 정도 규모로 성장하고 싶다, 이런 목표를 세우고 그걸 꼭 실천해 나가고 있죠. 이 분이 1957년생이니까 지금 58세 정도 됐잖아요. 20대 중반에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30여년 동안 이런 계획을 하나씩 하나씩 다 달성해 오신 분이에요. 좀 무섭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렇죠."
재일 한국인 3세로 차별도 유난하게 받았고 심하게 가난하기도 했던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지금은 일본 최고의 갑부가 되었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가 손정의. 그의 모토 중 하나가 "신중히 계획하되 반드시 실행한다"라는 걸 들은 기억이 난다. 어렵게 미국 유학을 떠나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간 19세의 손정의는 인생 50년 계획을 세웠고 그 실행을 위해 이같이 다짐했다고 한다.
손정의 회장을 십여년 전 한국에서 마주한 적이 있는데 마치 차돌멩이 같았다. 결심한 것은 뭐든 이뤄내겠다는, 결의(決意)가 단단하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맞았다는 걸 문 대표의 말이 증명해주는 셈이었다.
손정의 회장이 회사 설명을 들은 지 6분 만에 2000만달러(약 207억원)을 투자키로 결정했던 곳, 바로 알리바바였다. 당시엔 기업간(B2B) 전자상거래라는 신규 분야였고 가능성밖에는 믿을 것이 없었지만 중국에서 달려 온 영어강사 출신의 젊은이 마윈에게 손정의 회장은 과감하게 베팅했다. 손 회장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굳은 결의와 그걸 일관되게 끌고나갈 것이란 희망을 봤던 것 같다. 알리바바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이제 뉴욕 증시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손 회장은 야후 등 다른 투자자들과는 달리 기업공개(IPO) 이후에도 알리바바 보유 지분을 유지할 계획이다. 더 성장할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문 대표가 투자를 결정할 때 보는 것 역시 투자를 받으러 온 젊은 사업가의 눈, 그리고 결의라고 했다.
"눈빛 보고 투자한다, 라고 평소에 말하는데 창업자의 눈빛이 정말 중요합니다. 투자하려고 하는 기업들을 보면 면면이 다 다르거든요. 목표로 하는 시장도 다르고, 갖고 있는 기술도 다르고, 창업하는 사람의 색깔도 다 다르기 때문에 한 가지 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창업자를 비롯해서 경영진이 갖고 있는 결의와 열정, 이것이 투자하는데 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치라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투자해 오다보니 이제 `반 점쟁이`가 되었다는 농담을 했지만 문 대표는 곧 구체적인 평가 기준을 들려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철학, 그러니까 왜 이 일을 시작하고자 하는 가를 먼저 집중적으로 물어봅니다. 그리고 목표로 하는 시장에 대한 평가가 25% 정도 되구요, 그 시장이 지금 있든 없든 간에 얼마만큼 성장할 시장인가 이런 것들에 대한 전망도 평가하구요. 그리고 중요한 것이 대부분의 벤처기업, 스타트업 기업은 기술이 기반인 경우가 많거든요. 기술에 대한 평가가 나머지 25%, 이렇게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투자 성과를 거두었냐는 질문은 우문(愚問) 취급했다. 썬데이토즈, 데브시스터즈 등 많은 기업들에 투자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전체 투자협의회를 거치지 않고 심사역이 단독으로 투자 결정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오래 기다리고 있다. 신념과 열정, 용기 같은 걸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선진투자기법이란 것도 벤처 투자엔 통하지 않는다고 본다. 또한 벤처 투자라는 것이 단순히 머니 게임이 아니란 점도 분명히 했다.
"벤처 캐피탈이라고 하면 `캐피탈`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금융업이라고들 생각하시는데, 저는 그 캐피탈이 꼭 돈을 말하는게 아니라 휴먼 캐피탈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리고 그걸로 휴먼을 트레이닝하는 시스템이 바로 벤처 캐피탈, 벤처 투자죠. 젊은 청년 창업가들이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갖고 시작하는 것이 벤처 기업이고 스타트업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조직 경험도 적고 해서 경영을 잘 몰라요. 재무, 조직관리, 인사, 평가, 회계 이런 부분들을 도와주고 지원을 할 수밖에 없죠. 그건 간섭이라기보다는 지원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세련되고 노련한 스킬이 필요한 거죠, 벤처 투자자들에게는."
허나 벤처 투자라는 것이 자선 사업도 아니지 않나.
"젊은 창업가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픔이 있다면 함께 아파해줄 수 있는 여유가 이제야 생긴 것 같아요. 예전에는 투자한 회사가 잘 안되면 화가 났어요. 그런데 지금은 화가 나지 않아요. 한 10년쯤 이 일을 하다보니 화가 공감으로 바뀌더라구요. 같이 해법을 찾아보자 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아직까지는 벤처 설립과 성장, 투자 회수, 재투자를 위한 생태계 구축이 완전히 이뤄지진 않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게 문 대표의 판단이다.
"미국의 벤처 생태계가 발원된 시점은 1950년대 중반입니다. 미국의 국방 산업이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고 나자 그만한 수요가 창출이 안되어 위기에 처했죠. 그 때 미국 정부가 국방산업에 활용됐던 주요한 기술들을 민간에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 때 만들어진 회사가 쇼클리 반도체, 페어차일드 반도체 같은 회사들입니다. 페어차일드를 만든 8명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불리죠. 60년 전의 일이잖아요. 몇 세대를 지나야 가까스로 생태계 토대가 만들어졌는데 우리나라는 뭐하는 거냐, 라고 보는 시각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문 대표는 잘 뭉치고 잘 결의하고 함께 해나가는 것을 잘 하는 한국적 문화 때문에 벤처 사업의 시작은 잘 되는 편이고, 특히나 정부의 지원사격까지 있는 지금은 벤처가 다시 한 번 붐을 일으킬 수 있는 호기라고 본다. 그리고 10여년 전 겪었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성공 사례를 많이 만들고 이것을 시스템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벤처 기업들이 많이 좌절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만으로 오래 갈 수는 없거든요. 회사의 전략적 방향이라든지 조직 운영의 방향 이런 걸 세련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결국은 경험이 많이 쌓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끈기를 가지고 기업을 성장시키고 벤처 생태계 구축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벤처 기업을 하는 사람이나 여기에 투자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덕목일 겁니다."
인터뷰에 동석했던 소프트뱅크벤처스코리아의 투자사 아이디인큐의 김동호 대표는 "벤처 기업을 한다는 것은 끝나지 않는 여행을 한다는 것"이라고 비유했다. 벤처 기업을 한다는 것은 당장 얼마의 투자를 받고 얼마의 성과를 내고 언제 상장을 하고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과정으로 봐야 한다는 것.
문 대표는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이라고 동의했다. 문 대표의 인생은 이미 벤처 투자에 현저히 기울어져 있다.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그는 아마도 이 업계에서 계속 투자하고 지원하며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생태계를 만들어주려 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외모도 생각도 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