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달성한 사례는 보기 힘들어
생산·삶의 질 곱해 새 지향점 찾아

“국내총생산(GDP)은 경제가 무엇을 생산하는지 잰다. 인간개발지수는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사는지 잰다. 국내총인간성(GDH: Gross Domestic Humanity)은 한 나라의 국민이 함께 번영하면서 동시에 창조하고 있는지를 잰다.”
세계의 위대한 두 지표는 한 국가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그 어느 쪽도 그 국민이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는 묻지 않는다.
이 문장이 세상에 내놓은 지표에 관해 불편한 사실 하나를 짚는 데서 시작하자. 비교가 가능한 경제권 전체에서, 인간개발지수(HDI)는 1인당 소득과 0.94의 상관관계로 움직인다. 한 나라가 얼마를 버는지 말해 주면, 그 나라가 인간개발에서 어디쯤 있는지 거의 정확히 말해 줄 수 있다. GDP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도구가 더 먼 길을 돌아 결국 GDP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기가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마흐붑 울 하크는 경제성장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닿고 있는지 알고싶어 했고, 인간개발지수는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했을 뿐이다. 기대수명, 교육 연수, 소득은 그 질문에 맞는 적절한 근거다. 그러나 이 셋에는 나란히 세워 놓기 전에는 알아채기 어려운 공통의 속성이 있다.
얼마나 오래 사는가, 얼마나 오래 교실에 앉아 있었는가, 얼마를 받았는가. 이 모두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들이다. 당신이 ‘해낸’ 일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국가는 사람들에게 일이 일어나는 곳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일을 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누군가 작업장을 열고, 이웃을 고용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작하는 곳. 지구상의 모든 경제는 이것으로 돌아가는데, 어떤 대표 지표도 이를 기록하지 않는다.
GDP는 기록하지 않는다. GDP는 산출을 기록할 뿐, 그것을 창조하는 행위를 기록하지 않는다. 새로운 벤처가 만들어 내는 거래는 잡아내지만, 실험으로 살아 숨 쉬는 경제와 50년 된 기업들을 통해 같은 산출을 내는 경제를 구별하지는 못한다.
인간개발지수 역시 그 두 나라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 활동이 다른 어딘가에, 즉 소득에, 교육에, 수명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창조 그 자체는 이 지수에 보이지 않는다.
가장 쉬운 보완책은 기존 지표 옆에 기업가정신지수를 하나 더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처방은 틀렸고, 그 이유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한 나라는 절박함 때문에 수많은 사업 활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일자리도 안전망도 없는 곳에서 사람들은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시작하고, 통계상으로는 활기차 보인다. 그러나 그 밑의 삶은 위태롭다. 높은 생산과 낮은 번영. 활동만 평가하는 지수는 이것을 성공이라 부를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나라는 안전하고, 교육 수준이 높고, 오래 살면서도, 두 세대 전에 얻은 자원이나 맺은 협정에 기대어 새로운 것을 거의 만들지 않을 수 있다. 높은 번영과 낮은 창조성. 조건만 재는 지수에서는 이것 역시 성공이라 부른다.
실제로는 어느 쪽도 성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가 함께 상승하는가이다. 그리고 두 가지 사이의 관계는 그중 하나만 평가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두 축은 같은 국가적 틀 안에서는 함께 측정된 적이 거의 없다. 각각을 다루는 도구들은 서로 다른 기관이 서로 다른 목적으로 만들었고, 대체로 분리된 채로 제시돼 왔다.
그래서 여기,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숫자 하나를 소개한다. 국내총인간성(GDH)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인간 번영(Human Flourishing)’은 갤럽 월드폴을 바탕으로, 국민이 번영하고 있는지, 진짜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는지, 자기 일에 몰입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창조를 향한 인간의 동력(Human Drive to Create)’은 글로벌기업가정신모니터(GEM)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혁신하고 있는지,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 기회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선택이 아니라 필요성 때문에 시작한 활동은 집계 전에 할인율을 적용해 낮추도록 가중치를 두었다.
다음으로 이 지표가 작동하게 하는 중요한 규칙이 있다. 두 축의 점수는 단순 평균을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곱한 뒤에 제곱근을 취한다.
평균 방식은 한 국가가 약점을 덮고 넘어갈 수 있게 해 준다. 한쪽의 매우 높은 점수가 다른 쪽의 매우 낮은 점수를 가리고, 이로 인해 결과는 그럴듯해 보인다. 곱셈은 이를 차단한다. 국민은 번영하지만 아무 것도 창조하지 않는 나라는 낮은 점수를 받는다. 또한 맹렬히 창조하지만 국민이 지쳐 있는 나라도 낮은 점수를 받는다. 높은 점수로 가는 유일한 길은 둘 다 갖추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이 지수를 존재하게 하는 핵심 주장이다. 따라서 이 점수는 한쪽의 부족함을 다른 쪽으로 채우는 ‘보완’이 아니라, 두 가치의 ‘균형’에 높은 점수를 매긴다.
이것은 새로운 설문조사가 아니다. 이미 있는 두 세계적 도구를 결합한 것이며, 둘 다 보고되는 모든 경제권, 즉 현재 43개 경제권에서 산출되고 적용된다.
그 결과 주로 한 가지를 발견했는데, 이는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둘 다(번영과 창조) 해내는 곳은 거의 없다.’ 번영과 창조를 같은 틀 안에 놓고 보면, 둘 다 잘하는 나라는 극소수로 드러난다. 대부분은 한쪽이 강하고 다른 쪽이 부족하다. 어떤 나라는 끊임없이 만들어 내지만, 만드는 사람들이 소진되어 있다. 다른 나라는 안락하고 안전하고 교육 수준이 높지만, 창조의 동력이 놀랄 만큼 약하다.
개발정책은 이 둘이 함께 오른다고 가정해 왔다. 나라가 부유하고 안정될수록 창조는 저절로 따라온다고. 하지만 현재 측정 가능한 경제권 전체에서,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상승하지는 않는다. 불균형이 부유한 나라에서도, 가난한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이 숫자는 어떤 나라에 대한 판결문이 아니다. 일종의 렌즈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렌즈를 통해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대화가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는 스스로에게 두 가지를 물을 수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생산하고 있는가? 우리 국민은 얼마나 잘 보살펴지고 있는가? 둘 다 물을 만한 질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좋은 삶’에는 닿지 못한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또는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시도하는 일이 무모하지 않다는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두 가지를 결합하면, 한 국가는 전에는 물을 수 없었던 것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대가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은 채 국민에게 계속 생산하라고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 안락해진 나머지, 이제 아무도 중요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필요가 없어졌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신생 기업인가, 아니면 이미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인가?
이 걱정들 중 새로운 것은 없다. 장관들, 교수들, 창업자들이 여러 해 동안 이를 두고 논쟁해 왔다. 없었던 것은 누가 옳은지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제 숫자가 나왔고, 논쟁은 비로소 가리킬 만한 근거를 갖게 되었다.
국내총인간성은 그런 정신으로 내놓는 것이다. 43개 경제권, 두 개의 기둥, 하나의 숫자. 공개 데이터로, 누구나 되풀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국가를 보는 새로운 방식이지, 국가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가 아니다. 첫 시도는 수정되기 마련이고, 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지표는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기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