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가운 변화라 할 수 있겠다. 다만 환율이 내려간 것과 외환시장이 충격에 강해졌다는 평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최근 원화 강세 배경엔 수출업체의 달러 매도가 자리한다. 반도체 수출 호조와 경상수지 흑자가 달러 공급의 버팀목인 셈이다. 올 들어 9월까지 누적 수출액은 사상 처음으로 8000억달러를 넘었고 연 수출 1조달러도 가시권이다. 올해 8월까지 누적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2792억달러로, 한국은행의 당초 연간 전망치 4500억달러도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 버팀목이 얼마나 오래 원화 가치를 떠받칠 수 있느냐다. AI 투자 열풍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반도체는 전통적으로 경기사이클에 민감한 분야다. 최근에는 AI 투자 수익성과 반도체 호황의 지속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확보한 주문과 진행 중인 투자 등을 감안하면 AI 열기가 식는다고 당장 반도체 수출이 급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투자 둔화가 길어지면 수출 증가세와 달러 공급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주식시장 조정과 수출 둔화가 겹칠 경우 지금까지 달러 수요를 흡수하던 힘도 약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특정 산업이 벌어들이는 달러에 기대 환율이 안정됐다고 해서 경제 전반의 체력이 좋아졌다고 단정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호황이 벌어준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우선 재정에 대한 신뢰를 지켜야 한다. 최근 프랑스에서 보듯 재정 악화에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겹치면 국채시장은 물론 외환시장도 안심할 수 없다. 국가의 상환능력과 정책 대응에 의문이 생기면 투자자는 더 높은 이자를 요구한다. 국채 조달비용 상승은 민간의 자금조달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재정건전성은 채권·외환시장의 안정과 대외 신뢰를 지탱하는 기반이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를 항구적인 재정 여력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업황에 민감한 세입을 근거로 상시 지출을 늘리면 호황이 끝난 뒤에도 부담은 남는다. 필요한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성과가 낮은 사업을 정비해야 한다. 그래야 경기가 꺾였을 때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경제를 뒷받침할 여력도 확보할 수 있다.
재정을 아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서비스업 생산성을 높이고 신산업 진입을 가로막는 규제를 손질해야 한다. 인재가 성장산업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직업훈련을 개선하고, 여성과 고령층 경제활동을 가로막는 장벽도 낮춰야 한다. 반도체 호황의 과실이 투자와 일자리로 확산되도록 성장의 저변을 넓히는 일이다. 구조개혁을 통한 잠재성장률 확충은 세입 기반을 넓혀 재정의 지속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이 추진하는 원화 국제화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24시간 외환거래에 이어 시범운영 중인 원화 국제결제망의 안착이 중요하다. 해외 금융기관의 참여와 야간 유동성을 늘려 거래·결제 편의를 높여야 한다. 원화에 대한 신뢰를 뒷받침할 금융 인프라를 다지는 일이다.
원화의 신뢰는 달러를 얼마나 벌어들이느냐와 함께 앞으로도 벌어들일 능력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도체 경쟁력을 키우면서 다른 산업의 생산성과 재정의 대응력을 함께 높여야 한다. 호황은 개혁을 미룰 명분이 될 수 없다. 반도체가 든든할 때야말로 반도체만 믿지 않을 준비를 할 때다. kimnh21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