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 ‘혼란’
전문가 심사 폐지로 인기투표 우려

올해로 131년의 역사를 맞이한 미술계의 올림픽,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국제 심사위원단 전원 사퇴라는 전례 없는 혼란을 겪고 있다. 자본의 흐름과 문화적 권력의 향방을 가늠해 온 이 국제 미술 축제는 올해 예술을 넘어 지정학적 갈등의 현장이 되었다. 사태의 발단은 개막을 불과 9일 앞두고 5인의 국제 심사위원단이 전격적으로 감행한 집단 사퇴였다. 이들은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지도자가 있는 국가, 사실상 러시아와 이스라엘을 주요 수상 심사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재단 측이 표현의 자유와 검열 거부 입장을 고수하자 위원단은 전원 사퇴를 단행했으며, 이로 인해 비엔날레는 지정학적 갈등의 가장 뜨거운 도가니가 되었다.
비엔날레 재단은 개별 예술가에 대한 배제가 표현의 자유와 포용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실제로 국가의 폭력을 비판해 온 개인 작가들을 단지 국적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문화적 검열이자 집단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역사적으로 비엔날레는 냉전 체제의 대립 속에서도 진영을 넘어선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재단은 특정 국가를 전면 차단할 경우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고, 이는 향후 또 다른 검열로 이어지는 위험한 선례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전문가 심사체계가 무너지자, 재단은 티켓 소지자의 투표로 최고상 수상자를 가리는 대안을 내놓았다. 11월 폐막일에 발표될 이 투표 방식은 대중적 민주주의처럼 보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미술 현장과 분석가들의 시선은 세 갈래로 거칠게 나뉜다.
첫째, 제도권 큐레이터와 비평가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문가 심사라는 검증 체계가 공백에 빠진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간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황금사자상은 실험적이고 비판적인 현대미술에 국제적 권위를 부여해 온 상징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단의 전원 사퇴 이후 기존 황금사자상은 시상되지 않고, 양 전시장을 방문한 티켓 소지자가 투표하는 ‘비지터스 라이언’으로 대체됐다. 일부 비평가들은 전문적 논의와 맥락 검증을 거친 심사 대신 대중 투표가 미술의 가치 판단을 가시성과 호감도 중심으로 이끌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문화적 가치가 시장적 수요와 대중적 반응의 논리에 더 크게 좌우될 수 있으며, 작가와 작품의 장기적 평판을 형성해 온 권위의 기준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둘째, 시장 분석가와 아트 딜러들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문화 분야에 상설화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유럽연합이 러시아의 참여를 이유로 베네치아 비엔날레 재단에 지원하던 영상,영화 관련 200만 유로 규모의 다년간 지원금을 철회한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는 특정 국가의 문화 참여를 둘러싼 정치적 판단이 공공 문화재정과 국제 협력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글로벌 문화 펀딩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부각시켰다. 일부 시장 관계자들은 예술 자산이 더 이상 지정학적 안전지대로 간주되기 어렵다며, 국가 리스크가 예술품 거래와 기관 후원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진단한다. 여기에 100개 국가 참여를 둘러본 대중이 자본력과 홍보 역량이 결집된 국가관의 조직적 마케팅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관람객 투표제가 시장 왜곡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셋째, 현장 예술가들의 반응은 분노와 연대로 이어지고 있다. 100명이 넘는 참가 작가와 콜렉티브는 관람객 투표용지와 관련 홍보물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삭제하고, 자신들에 대한 기투표를 무효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요구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며 법적 조치를 위한 다음 단계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작가들은 투표 절차가 투명성과 책임성을 결여했다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관람객 투표의 대상으로 유지되는 것은 참가자는 물론 관객에 대한 존중도 결여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는 예술가의 의사와 작품의 맥락이 대중 투표라는 경쟁 구도 안에 일방적으로 편입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준다.
결국 이번 사태는 동시대 미술계가 직면한 구조적 전환을 보여준다. 그동안 현대미술은 글로벌 자본과 제도 속에서 성장해 왔으나, 전쟁과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가 개입하는 국면에서 미술 플랫폼 역시 가치 중립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됐다.
전문가 심사 체계의 공백, 지정학적 갈등, 시장 구조의 불안정성은 한국 미술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리즈 서울 개최 이후 글로벌 마켓의 주요 거점으로 편입된 한국 미술계는 그동안 외형적, 양적 성장에 치우쳤다는 지적이 있다. 이번 사태는 세계 미술 지형의 충돌을 독자적 기준으로 읽어내고 예술적 가치와 시장 논리 사이에서 방어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숙제를 던진다. 주체적인 비평 담론이 없다면 한국 미술계 역시 글로벌 자본과 지정학의 변동성에 노출될 수 있다.
오는 11월 22일 투표 결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가 남긴 질문이다. 베네치아가 쏘아 올린 신호탄은 글로벌 문화 자본의 거버넌스 재편을 보여주며, 자본과 정치, 예술의 역학 관계를 다시 묻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