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하 박사(한국사립대학총장협의회 자문위원)

인공지능(AI)과 첨단산업을 중심으로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대학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대학은 인재양성과 연구개발, 산업혁신을 이끄는 국가경쟁력의 핵심 기반이다. 그러나 세계 대학평가에서 나타난 한국 대학의 경쟁력은 여전히 주요 경쟁국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26년 THE 세계대학평가에서 세계 200위권에 포함된 국내 대학은 6개에 불과하다. 국내 최고 대학인 서울대도 58위에 머물렀다. 중국 칭화대 12위, 베이징대 13위, 싱가포르국립대 17위와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QS 세계대학평가에서도 서울대는 31위에서 38위로 하락했고, 세계 100위권에 진입한 한국 대학은 3개에 그쳤다.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적 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정부도 고등교육 재정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2026년 고등교육 예산은 16조392억원으로 2022년보다 34.8% 증가했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국가장학금 관련 예산 5조5371억원과 국립대학 운영지원 예산 5조2401억원이 전체의 67.2%를 차지한다. 이를 제외하면 대학의 교육·연구 혁신에 실질적으로 투입할 수 있는 재원은 32.8%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대학 설립 유형에 따른 재정지원의 불균형이다. 국립대학에는 안정적인 운영재원이 제공되는 반면, 사립대학은 등록금 규제와 제한적인 재정지원 속에서 경쟁해야 한다. 국립대학 운영지원비는 2022년 3조8455억원에서 2026년 5조2401억원으로 36.3% 증가했다. 국립대학 육성사업비는 같은 기간 1500억원에서 8736억원으로 482.4% 급증했다. 서울대 출연지원금도 2026년 7007억원으로 2022년보다 30.3% 늘었다.
학생 1인당 지원에서도 차이가 뚜렷하다. 국공립대 경상운영비를 제외한 재학생 1인당 정부 지원액은 2024년 국공립대 730만원, 사립대 510만원으로 220만원의 격차를 보였다. 국립대학에 대한 지원 확대 정책이 이어지면 이러한 차이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대를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고,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통해 거점국립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국립대학은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만큼 일정 수준의 운영비 지원도 당연하다. 문제는 국립대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정지원을 보장하면서, 국가경쟁력에 기여할 역량을 갖춘 사립대학에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지원과 강한 규제를 적용하는 구조다.
최근 정부는 부산대·전남대·충남대를 집중 육성 대상으로 선정하는 등 거점국립대학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들 대학의 2027학년도 수시모집 지원자도 전년 대비 5.1~19% 증가했다. 국립대학에 대한 집중투자가 대학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이 사립대학과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거나 지역 사립대학의 위기를 가속화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
한국 고등교육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사립대학은 국가발전의 중요한 인프라다. 지난 수십 년간 산업화와 인재양성, 지역사회 발전을 뒷받침해 왔다. 특히 주요 사립대학은 첨단산업 인재양성, 산학협력, 기술사업화, 외국인 유학생 유치 등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사립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은 단순한 운영비 보조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 경쟁력에 대한 투자로 봐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립대학에 동일한 재정을 지원하자는 것은 아니다. 세계적인 연구역량을 갖춘 대학, 첨단산업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 지역경제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대학에는 설립 유형과 관계없이 전략적인 투자를 확대해야 한다. 국가재정 투자의 기준은 '국립대냐 사립대냐'가 아니라 '얼마나 큰 교육·연구 성과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느냐'가 돼야 한다.
재정지원과 함께 규제개선도 필요하다. 역량 있는 사립대학에는 학사·조직·인사·재정 운영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정부는 세부적인 운영 통제보다 목표와 성과를 평가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규제 샌드박스와 네거티브 규제를 도입해 대학이 스스로 혁신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제는 '성과 기반·경쟁형 재정지원'으로 정책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연구성과와 기술이전, 산학협력, 취업·창업, 지역사회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성과가 우수한 대학에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 국립대학을 육성하는 동시에 경쟁력 있는 사립대학도 세계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원적인 고등교육 생태계가 필요하다.
대학의 경쟁력이 곧 국가의 경쟁력이다. 특히 지역 사립대학의 위기는 지역 인재와 산업 기반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가 투자해야 할 대상은 특정 설립 유형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어갈 역량 있는 대학이다. 사립대학을 살리는 것이 지역을 살리고,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