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평가하는 신용에 의문 제기
‘갚을 의지’ 찾는 방법에 눈 돌려야

금융의 출발점은 무엇일까. 돈일까, 담보일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믿음일까. 오늘날 금융기관은 신용점수와 소득, 자산 등을 통해 돈을 갚을 능력을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만으로 사람의 신뢰를 온전히 판단할 수 있을까. 최근 접한 한 민간단체의 무이자대출 15년 기록은 금융의 본질에 관한 오래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무이자대출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는 이자를 금지하며, 어려운 사람에게 이자 없이 돈을 빌려주고 원금만 돌려받는 ‘카르드 하산(Qard Hasan)’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파키스탄에서 출범한 아크후와트(Akhuwat)다. 기부금을 재원으로 저소득층에 무이자 소액대출을 제공한다. 그러나 단순히 믿음만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아니다. 지역사회의 평판을 심사하고 보증인을 세우며, 모스크 등 종교시설과 공동체를 활용한다. 이슬람의 종교적 규범과 공동체의 책임이 일종의 사회적 담보로 작용하는 구조다.
실제로 파키스탄의 15만 건 이상 대출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이슬람 대출의 부도율이 일반 대출보다 현저히 낮았으며, 종교적 신념이나 네트워크 효과가 상환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시됐다. 따라서 높은 상환율을 단순히 무이자의 효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 같은 종교적 규범이나 공동체의 보증 없이도 믿음에 기초한 금융이 가능할까. 최근 창립 15주년을 맞은 사단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의 무이자대출은 이 질문에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주로 기부금으로 재원을 마련해 담보도, 보증도, 이자도 없는 ‘3무(無) 대출’을 해왔다. 처음에는 10만원을 빌려주고 성실하게 상환하면 100만원, 200만원, 300만원으로 한도를 높인다. 지금까지 1만1000여 건, 50억원이 넘는 대출이 이루어졌고 2026년 6월 발표된 상환율은 90.1%에 이른다.
물론 아무에게나 대출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를 선정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고, 소액으로 시작해 상환 실적이 쌓인 사람에게 더 큰 기회를 준다. 사후관리 역시 작용한다. 따라서 높은 상환율을 ‘믿음’ 하나의 효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15년의 경험에서 주목되는 것은 따로 있다. 이들은 기존 금융에서 충분한 신용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에게 먼저 믿음을 건넸다. 그리고 많은 이용자가 성실한 상환으로 그 믿음에 응답했다. 상환된 돈은 다시 다른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재원이 되었다. 돈을 빌려준 것이지만, 달리 보면 믿음을 빌려준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상환되어 돌아왔다.
제도권 금융은 기본적으로 ‘얼마나 갚을 능력이 있는가’를 평가한다. 소득, 직업, 자산, 부채, 연체 이력 등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예금자의 돈을 보호하고 신용위험을 관리하려면 당연히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상환능력과 상환의지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소득이 적거나 불규칙하다고 해서 빚을 갚으려는 의지까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무이자대출의 경험은 여기에서 기존 신용평가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갚을 능력’과 함께 ‘갚으려는 의지’를 좀 더 잘 발견할 방법은 없을까. 물론 사람의 인상이나 막연한 믿음으로 판단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은 금융거래에서 실제로 약속을 지키고 성실하게 상환한 행동과 기록을 신용평가에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질병이나 실직 등으로 갚지 못한 사람을 상환의지가 부족한 사람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는 정교함도 필요하다.
앞으로의 과제도 있다. 지난 15년이 믿음을 건네고 그 믿음이 돌아올 수 있음을 보여준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그 신뢰를 경제적 자립으로 연결해야 한다. 가계수지와 부채관리 같은 생활금융교육을 강화하고, 축적된 성실상환 기록이 신용회복과 제도권 금융 이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통로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작은 민간단체 혼자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와 금융기관, 서민금융 관련 기관의 제도적 지원과 협력이 필요한 이유다.
금융의 본질은 결국 사람 사이의 믿음과 신뢰에 있다. 현대 금융은 그 신뢰를 숫자로 평가하는 데 크게 발전해 왔다. 이제는 숫자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신뢰를 발견하고 키우는 방법에도 눈을 돌릴 때다. 믿음을 주면 믿음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무이자대출 15년의 실험이 우리 금융에 던지는 메시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