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들면서 세상은 넓어졌다. 책상 위의 선이 운동장으로, 그리고 도로로 이어졌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만나는 중앙선과 차선도 선이다. 이를 어기면 교통단속이나 타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따라가야 할 선이 있다. 어린 시절의 그 ‘금’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나아가 생명까지 지켜내는 질서의 기준이 되었다.
도로의 선은 우리를 막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속도로 나들목의 차량 유도선은 방향을 안내하고 운전자의 실수를 줄여준다. 나들목을 놓쳐 한참을 돌아간 경험이 있다면, 그 초록색·분홍색 선이 얼마나 요긴한지 잘 알 것이다.
도로에 선이 처음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911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도로 중앙에 선을 그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차량의 길을 구분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우유 수레가 흘린 하얀 자국에서 착안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도로 위의 선이 자동차 시대의 질서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만든 법과 제도 역시 하나의 선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정해 놓은 사회의 규칙이다. 범법(犯法)이란 결국 공동체가 정한 선을 넘어서는 행위다. ‘선을 넘었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앞장서서 그 선을 지켜야 할 위치에 있는 이가 오히려 경계를 가볍게 여기거나 넘는다면 공동체의 질서 자체가 흔들린다. 공직자에게 법과 규칙을 대하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디자인’은 무엇일까. 디자인을 아름다운 형태나 세련된 장식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지켜야 할 선과 가야 할 길을 안내하는 기준에서부터 출발한다. 법과 제도가 사회의 보이지 않는 선이라면, 디자인은 그 선을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드러내는 일이다. 좋은 디자인은 선 하나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하며, 절제된 형태 속에 강력한 질서와 안정감을 담아낸다.
그러나 잘 설계된 선과 명료한 디자인이라 해도 구성원들이 이를 외면한다면 소용이 없다. 차선을 무시하면 사고가 나고, 유도선을 따르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들어선다. 디자인은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들의 실천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선은 규칙이다. 어린 시절의 놀이부터 도로 위 안전까지, 선은 서로의 영역과 질서를 지켜준다. 그리고 좋은 디자인은 그 약속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어린 시절 금을 밟으면 “죽었다!”고 외치던 그 말 속에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가 들어 있었다. 선을 지키는 것, 규칙을 지키는 것,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 그리고 필요하다면 더 나은 길로 이끄는 선을 새로 그리는 것. 눈에 보이는 선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마음의 경계 또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디자인일지 모른다.
삶의 갈림길에서 망설일 때마다,
“분홍색 선을 따라 진출하세요”라는 안내가 뜬다면 얼마나 좋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