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유주선 칼럼] 다시 가다머의 해석학을 새기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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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법규정을 현 맥락서 파악케해
법조문 얽매인 기계적 객관성 비판
살아있는 정의 실현할 토대 마련해

해석학(Hermeneutics)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 주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Hermes)를 어원으로 한다. 원래 성서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성서해석학으로부터 해석학이 출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 개혁 이전까지 성서해석학은 성서의 교리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신봉하였지만, 종교 개혁 이후에는 텍스트 본위를 해석의 추구 대상으로 삼았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신학은 성서가 여러 실존 저자에 의해 집필된 역사적 문헌으로 보고, 성서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다양한 문헌을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전개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해석학은 문학, 역사, 철학 등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 제 분야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학문적 방법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해석학의 조류는 실정법을 토대로 법규를 적용하는 법률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흐름의 근저에 바로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자리잡고 있다. 독일의 대학도시 마르부르크에서 태어난 20세기 해석학의 거장 가다머는 그의 주저 ‘진리와 방법(Wahrheit und Methode)’을 통해 인문과학 전반에 걸쳐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가다머의 해석학은 법철학과 법해석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가다머는 법학적 해석이 단순히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이해의 본질을 보여주는 대표적 본보기라고 주장한다.

특히 최근 법원 재판 과정에서나 판결 결과에 대해 사회적 갈등이 큰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성문법에 있어서 법해석은 중요하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이 법학에 미친 주요 영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법해석학의 모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신학적 해석학과 법률 문서를 해석하는 법학적 해석학을 동일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가다머는 법률에서 판사의 판결이나 법규 적용 과정이야말로 인간이 텍스트를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가장 모범적인 ‘해석학적 사건’이라고 보았다.

즉, 법학이 여러 해 동안 다져온 ‘법 해석’의 실천적 경험은 단순히 법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과거의 전통(Uberlieferung)인 법률 규정을 현재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살아있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보편적인 철학적 모델로 격상시켰다.

둘째, 법규 적용 시 ‘지평의 융합(Horizonverschmelzung)’ 기능의 가치 부여를 들 수 있다. 가다머는 이해(Verstehen)를 ‘지평의 융합’으로 정의했다. 제정 당시의 입법자 의도, 이른바 과거의 지평과 판사가 처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상황인 현재의 지평이 만나는 과정에 법률적 판단이 발생한다.

법관은 원래 법규 제정 시 입법자의 의도만을 고려하여 단순히 법규 조문을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대적 요구와 구체적 사건의 맥락 속에서 법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Schopfung)하고 적용해 가며 완성해 나간다. 가다머는 이 점을 철학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셋째, 편견(prejudice)과 전통(Uberlieferung)의 재평가를 들 수 있다. 이는 계몽주의 시대에 비판을 면치 못했던 편견의 극복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선이해(Vorverstandnis)의 긍정이다. 근대 계몽주의는 ‘편견’이나 ‘전통’을 이성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았다. 그러나 가다머는 인간은 언제나 역사적 전통과 선입견, 이른바 선이해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법률 적용 역시 마찬가지이다. 판사가 법을 해석할 때 백지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축적된 판례, 법적 전통, 그리고 사회적 가치관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접근하게 된다. 이러한 법적 전통과 선판단(先判斷·Vorurteil)이 법규 발견(Findung) 과정에서 필수적인 조건이자 안내자에 해당한다.

법학에서 법률 규정은 일반적인 내용과 추상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적용할 수 있는 법규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다수 발생한다. 구체적 사실과 추상적 규정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에 대한 법관의 고민이 시작된다. 분쟁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사안에 합당한 규정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법학적 해석학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법학적 해석학은 법학이 단순한 실무적 기술이나 도구적 방법론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이 역사적 전통 속에서 규범과 현실을 어떻게 매개하고 이해하는가를 보여준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 해석자의 역사적 선이해와 현재적 적용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함에 따라 판사의 임의대로 해석하는 주관주의나 자의적인 법규 적용이라는 상대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주관이 완전히 배제된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객관성을 기대했던 근대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의 이해라는 작용이 항상 역사성과 권위(Autoritat)를 배제할 수 없다는 점과 주관주의의 위험성을 텍스트의 권위, 전통의 구속력, 대화와 공적 검증을 통해 죽은 법규에만 얽매이지 않고 살아있는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해석학의 공헌은 간과할 수 없다. 법학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에 감사하여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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