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김한진의 시황읽기] ‘인기투표’ 뒤 시장은 ‘무게’를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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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반도체 사이클에 수급 쏠림
자기조정 뒤 실적 따지는 과도기로
미완성 AI밸류체인, 실물도 대비를

“주식시장은 단기로는 인기투표 기계지만, 장기로는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현대 증권분석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저민 그레이엄이 남긴 이 명언은 주가의 단기 변동성과 기업의 장기 본질가치 간의 관계를 명쾌하게 짚어준다.

실제로 주가는 꽤나 자주 기업의 실질 가치와 무관하게 출렁인다. 시장 참여자들의 심리나 수급 요인들이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소음들이 잦아들면, 시장은 결국 기업 본연의 가치라는 ‘펀더멘털 저울’로 향한다. 아무리 화려한 인기를 누린들, 실적이 나쁘면 무게를 잃고 추락하며, 반대로 잠시 외면을 받더라도 제 가치만 튼튼하면 순식간에 본질가치에 수렴하는 게 주가다.

우리보다 역사가 긴 미국에서 지난 100년간 배당금을 재투자한 주식의 연평균 총수익률(Total Return)은 약 10%에 달했다. 이 수익률은 장기간 물가를 포함한 경제성장률이나 기업이 거둔 이익과 궤를 같이해 왔다. 최근 투자의 현인 워런 버핏이 “지금 주식시장은 마치 카지노와 같다”라고 일갈한 것 역시, 투자자들이 눈앞의 인기에만 몰입한 나머지, 본연의 ‘저울 투자’에서 벗어나 있음을 경고한 맥락일 것이다.

지난 7월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반도체 주가가 급락한 것은 단기에 이들 업종에 너무 많은 인기가 폭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원래 배경은 이들 기업의 이익이 너무 놀랍도록 좋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각국의 반도체 기업들이 해당 증시에서 차지하는 이익의 비중과 시가총액 비중은 대체로 비슷하며 우리의 경우는 이익의 비중이 훨씬 더 크다. 저울 자체가 고장 난 게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는 더 이상 주식을 매수할 주체가 없을 정도로 ‘과밀화된 포지션(Crowded Position)’에 있었다. 어떤 섹터나 모멘텀 지속 기간에는 강력한 상방 수익률이 보장되지만, 매수세가 극에 달하면 아주 작은 충격에도 균형이 깨지고, 그간 쌓인 ‘빚투’ 물량까지 쏟아지면서 주가 낙폭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후 매물이 매물을 부르는 혹독한 ‘자기조정(Self-Correcting)’ 과정을 거쳐 반도체 주가의 레버리지 청산은 일단락됐다. 최근 반도체 주가의 폭락이 일시적인 수급 꼬임 때문인지, 아니면 약세장의 전환 신호인지를 가르는 진실게임은 이미 시작됐다. 즉 진짜 저울이 고장 난 것인지 그 여부를 따지는 과정인데 이와 관련해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뜻밖의 변동성 충격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투자자들은 저울의 눈금을 예전보다 깐깐하게 보려고 할 것이다. 빅테크 기업들의 클라우드 매출 성장과 마진율, AI 자본지출(CapEx)로 인한 현금흐름 악화와 자본조달 이슈들, 그리고 중국의 추격 등이 지금 도마에 올라 있다. 현재 코스피 선행 주가수익비율(PER·5배)이 2008년 금융위기 때(6.3배)보다 낮고, 반도체 투톱의 선행 PER이 시장 평균보다 훨씬 낮은 것이 반도체 사이클의 다운 턴(하강국면)을 선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절호의 매수 기회임을 뜻하는 것인지를 가리는 중요한 구간이다.

다음은 주도주가 역대급 수급 충격에서 회복하는 동안, 실적이 뒷받침되고 저평가된 다른 업종으로의 순환매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아직 강세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이며 시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투자자들이 시장을 완전히 탈출하기보다는 대안을 찾는 것은 긍정적이다. 수급 중심의 ‘인기투표 장세’를 뒤로 하고 실적 중심의 ‘저울 장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그간 반도체에 쏠렸던 수급과 인기가 주변으로 분산돼 시장이 건강해지는 것은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이렇게 AI와 반도체 사이클에 대한 검증 과정을 거치면서 증시는 서서히 새로운 방향을 찾아갈 것이다. AI 자본지출과 반도체 사이클을 둘러싼 의구심들을 잘 이겨 낸다면 시장의 먹구름은 걷힐 터인데, 이와 관련해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지금 투자자들은 모두 AI 데이터 센터와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인 공급 부족이 당분간 지속될 것임을 알려주는 선명한 증거를 손에 거머쥐고 싶어 한다. 그러나 늘 그렇지만 모두가 명확한 증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즈음에는 이미 주가가 그에 걸맞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결국 우리는 시장이 지닌 집단 지성을 신뢰하면서 시장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가령 반도체 기업의 물주이자 수요자인 빅테크 기업의 주가가 건재하다면 그것은 반도체 사이클이 아직 좀 더 남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끝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AI 산업과 반도체 업황에 대한 진실 게임의 결과는 단지 증시의 방향성을 넘어, 향후 세계경제와 금융시장 전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그 무게감이 여느 때와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AI를 둘러싼 생태계와 밸류 체인은 세계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내재된 불확실성만큼이나 앞으로 실물경제 또한 변화무쌍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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