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생태’ 공동체로 평화의 첫걸음
국제기구 지렛대 삼아 상호의존 조성

분쟁의 역사를 보면, 정치가 막히고 이념이 충돌하는 막다른 골목에서의 마지막 탈출구는 언제나 다름 아닌 ‘경제’였다. 인간은 이념을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가장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한다.
보라. 30년 내전을 끝낸 인도네시아 아체(Aceh) 지역의 평화 정착 저력은 경제에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아체 자치정부에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 수입의 70%를 직접 갖도록 파격적인 경제적 특권을 주었다. 반군들은 총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평화가 곧 돈이자 생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는 반군들에게 약속한 경제적 보상과 일자리가 제때 공급되지 못했다. 배가 고파진 전직 반군들은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다. 평화를 지탱하는 ‘경제적 엔진’이 꺼지는 순간, 평화협정은 종이 위의 서명으로 전락한다는 서늘한 교훈을 준다.
지금 한반도의 시계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다. 군사적 긴장감 속에서 ‘남북 평화’라는 단어는 현실성 없는 감상주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교류가 단절된 한반도에서 경제적 상호의존은 어떻게 그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까? 당장 대규모 경제 협력은 국제 제재와 정치적 부담 때문에 불가능에 가깝다.
돌파구는 ‘낮은 단계의 비정치적 협력’이다. 그 실마리를 기후 위기와 재난 대응에서 찾으면 어떨까? 남북한 접경지역의 안전을 확보하는 실용적 이익 공유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후 공동 대응 프로젝트’는 정치·군사적 대화가 완전히 끊긴 교착 상태에서 남북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념에는 국경이 있어도 기후에는 국경이 없다. 서로의 생존을 위해 맞잡는 ‘한반도 기후 생태 공동체’가 대안이다.
첫째, 임진강과 북한강 수계의 수문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남북 공동 조기경보 센터’를 가동하자. 이는 상대의 자원을 제도적으로 연결해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철저한 ‘제도적 현실주의’의 구현이다.
둘째, ‘한반도 평화 탄소배출권(Carbon Credit)’을 위한 협력이다. 북한의 산림은 상당 부분이 황폐해져 매년 대규모 산사태를 겪고 있다. 남한은 국제 사회의 탄소 중립 기준을 맞춰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남북이 협력해 북한에 조림 사업을 진행하고, 이에 따라 확보된 탄소 흡수량을 남한 기업의 탄소배출권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상호의존적 경제학’이다.
셋째, 접경지역 ‘가축 전염병 및 산불 공동 방역·방화선 구축’이다. 생태계의 파괴 앞에서는 남과 북이 따로 없다. 접경지역을 ‘남북 공동 방역·방화 특별구역’으로 지정해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자. 위협에 대한 공동 대응은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부수적 효과까지 거둘 수 있다.
현재 북한과의 경제 협력은 대부분 UN 대북 제재에 저촉된다. 그러나 기후 위기 대응과 환경 보호는 국제 사회가 예외적으로 허용하거나 장려하는 분야다. 평화의 첫걸음은 거창한 이념의 통합이 아니다. 마실 물을 걱정하고, 태풍의 길목에서 서로를 지켜주는 ‘기후·생태 연대’에서 시작된다. 기후 위기라는 파도 앞에서 남과 북은 공동 운명체다.
남북이 직접 마주 앉기 어렵다면,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UN 개발계획(UNDP) 같은 국제기구를 지렛대로 삼자. 국제기구가 주도하고, 남북한이 서로 의존하는 환경을 조성하자. 정치가 멈춘 지금, 정부는 경제적 상호의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질적 장치를 마련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