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업의 공장 가동률과 생산 계획은 매순간 변한다. 경영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소비하는 전력량 역시 수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존 전력 시스템 안에서는 전력 수요가 출렁여도 조달 방안을 고민하지 않았다. 플러그를 꽂으면 필요한 만큼 전기를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벌 공급망이 RE100을 강제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친환경 전기를 구하는 것 자체가 녹록지 않다.
현재 RE100 전기 조달 방식은 기업 현실과 정면 충돌한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기업의 신용도 평가다. 재생에너지 발전사 입장에서는 20년 장기 계약이 유리하다. 20년간 전기를 안정적으로 판매해야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기간 전력 구매가 가능한 곳은 보통 신용 등급이 우량한 대기업이다. 국내 기업의 99.9%는 중소·중견 기업이다. 즉 대다수 기업은 RE100 협상 테이블에 착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만약 신용등급이 좋아 계약을 체결해도 ‘20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기업은 날마다 불확실성을 마주한다. 경기 침체가 올 수 있고 공급망이 변경될 수도 있다. 이에 맞춰 전력 사용량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20년 계약에 묶이면 유연성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공장 가동을 줄여도 전기는 계약 조건에 따라 무조건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리스 회계기준(K-IFRS 제1116호)까지 적용되면 20년간 지불해야 할 전력 구매 요금이 부채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런데 장부상 부채비율이 높으면 기업은 금융권의 대출 심사 허들을 넘지 못한다. 경영자 입장에서 치명적 요인이 된다.
이러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선 3년 혹은 1년 미만 단위의 유연한 ‘단기 전력 거래’ 시장이 반드시 열려야 한다. 짧은 계약 기간은 발전사가 요구하는 신용 등급 문턱을 낮춘다. 특정 발전소 설비와 체결하는 장기 계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력 플랫폼과 계약하고 해당 플랫폼에 모인 집합자원을 통해 필요한 만큼 전기를 이용하는 구조다. 설비를 빌려쓰지 않으니 장부상 부채 리스크가 원천 차단된다. 금융권의 대출 심사 거절 우려도 해소된다. 기업 입장에선 공장 가동률에 맞춰 RE100 전기를 유연하게 조달할 수 있다. 초기 설비 부담이 없는 구독 형태의 전력 상거래가 실현되는 것이다. 기업의 ‘RE100 전기 수요’는 새로운 전력 상거래 시장을 여는 열쇠다.
수요 기반의 단기 거래 시스템을 현실화하는 것은 데이터 제어력이다.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진다. 전기를 소비하는 기업의 소비 곡선도 시시각각 요동친다. 즉 재생에너지의 간헐적 공급량과 기업의 소비량을 실시간 오차 없이 매칭해야 한다. 이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조율할 지능형 운영체계가 AI 기반의 가상발전소(VPP) 기술이다. 시스템 속 AI는 실시간 기상 조건과 기업의 전력 소비 패턴을 학습하고 초 단위의 발전량과 소비량을 정밀하게 예측한다. 전국에 흩어진 수요 데이터와 분산형 발전 자원 데이터가 소프트웨어로 실시간 응집된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를 정교하게 운영해 기업의 단기 RE100 수요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구조다.
글로벌 공급망이 강제하는 RE100 스탠더드는 단기 전력거래 시장 개방을 앞당길 것이다. 안정적인 RE100 이행을 위해선 유연한 단기 거래가 반드시 요구되기 때문이다. 단기 시장은 기업의 실제 수요가 모든 거래를 주도한다. 기업이 전력 조달 통제권을 쥐면 글로벌 탄소 장벽도 극복할 수 있다. 결국 수요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우리 기업의 확실한 생존 전략이다. 지금까지 전력시장은 발전소가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가 시장을 결정했다. 앞으로는 기업과 소비자가 언제, 얼마나, 어떤 전기를 원하는지가 시장을 설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