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물꼬’ 없는 저수지는 썩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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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성장펀드가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정책 금융을 앞세운 대규모 자금이 사모펀드(PEF)와 벤처캐피털(VC) 시장으로 빠르게 유입되는 분위기다. 투자 업계는 오랜만에 넘치는 유동성에 활기찬 모습이다. 정부는 이를 혁신 성장의 마중물로 내세우고, 투자 기관들은 풍부해진 실탄을 손에 쥐고 투자 기회를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은행들도 혁신 자금 공급 성과를 끌어올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증권사들도 투자종합계좌(IMA)와 발행어음으로 조달한 자금 수십조원을 모험자본에 투입할 태세를 갖췄다.

자금이 물밀듯이 들어오니 쾌재를 부르지만, 자금을 운용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걱정이 앞선다. 우선 국내 시장에 투자할 만한 혁신 기업 등 투자 대상이 상당히 한정돼 있다. 수요는 폭증하는데 공급은 한정돼 있으니 가격(밸류에이션)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실제로 최근 국내 유망 스타트업과 비상장 혁신기업을 둘러싼 투자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기업 밸류에이션이 실적과 무관하게 가파르게 치솟는 양상을 보인다.

밸류에이션 인플레이션은 시장 전반의 왜곡을 초래한다. 실제 사업 모델과 수익 창출 능력보다 투자 유치 금액과 기업 가치 산정 배수(멀티플)가 혁신의 지표처럼 통용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과도하게 높은 밸류에이션에 투자한 기관들은 나중에 현실적인 회수 가격과의 괴리를 감당해야 한다. 비싼 값을 들인 투자는 자칫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회수(엑시트) 시장의 경색이다. PEF와 VC의 전통적인 회수 경로는 기업공개(IPO), 구주 매각, 인수합병(M&A) 세 가지로 압축된다. 그런데 지금 이 세 가지 경로가 동시에 좁아지는 분위기다. IPO 시장의 경우, 중복상장 금지 규정을 비롯한 각종 규제가 누적되면서 상장 자체의 문턱이 높아졌다. 이미 해외 증시에 상장된 기업이나 복잡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의 국내 상장은 사실상 차단되다시피 했다. 외형적으로는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혁신기업의 공개 시장 진입 통로를 막는 결과를 낳고 있다. 투자 기관으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회수 수단이 사실상 봉쇄된 셈이다.

구주 매각과 M&A 역시 녹록지 않다. 국내 M&A 시장이 만성적으로 위축되면서 투자 기관의 포트폴리오에는 회수되지 못한 투자 자산이 빠르게 누적됐다. 만기가 다가오는 펀드들은 엑시트 압박에 시달리고 투자자들과 소송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생산적 금융을 확대하는 방향에 이론을 제기할 이는 없다. 문제는 자금 공급이라는 파이프는 활짝 열어두면서, 자금이 순환하는 데 필수적인 회수 시장의 출구는 규제로 촘촘히 막아두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엔진의 흡기만 키우고 배기는 틀어막은 채 출력을 높이려는 것과 다름없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엑시트 시장 규제의 전면 재점검에 나서야 한다. 중복상장 금지 규정은 투자자 보호라는 명분 아래 혁신 기업의 자금 조달과 투자자 회수를 동시에 막고 있지는 않은지 냉정하게 살펴야 한다. IPO 문턱을 합리화하고, 대기업의 전략적 M&A가 혁신 생태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규제의 틀을 재설계해야 한다. 한국의 주력 산업 공급망(밸류체인)에 투자가 연결될 수 있는 구조적 유인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자금의 물꼬를 트고 그 물이 흐를 수 있는 수로를 정비하는 것이 국민성장펀드의 ‘성장’을 이끄는 필요조건이다. 돈이 도는 생태계, 투자와 성장과 회수가 선순환하는 자본시장 없이는 제대로 된 혁신 생태계가 조성되기 어렵다. 물꼬가 없는 저수지는 결국 썩는다. l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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