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양식품이 5월 12일 이사회를 열고 김정수 부회장의 회장 승진을 결의했습니다. 취임일은 6월 1일이고요. 2021년 12월 부회장에 오른 지 약 5년 만의 승진입니다. '불닭볶음면'이라는 이름 하나로 전 세계 라면 시장의 판도를 바꿔놓은 인물이, 마침내 삼양식품의 꼭대기에 서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제대로 따라가려면, 한참 전으로 돌아가봐야 합니다. 27년 전인 1998년의 삼양식품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회사였거든요.

삼양식품은 1963년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 '삼양라면'을 세상에 내놓은 회사입니다. 한때 라면 시장 점유율이 80%에 달했을 만큼 독보적이었죠. 하지만 1980년대 중반 농심에 1위 자리를 내준 데 이어, 1989년에는 '우지 파동'이라는 치명타를 맞습니다. 라면 기름에 공업용 소기름을 썼다는 의혹이 터진 건데요, 결국 199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긴 했지만 이미 8년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그 사이 시장 점유율은 10%대로 곤두박질쳤고요.
설상가상으로 1997년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삼양식품은 부도를 맞습니다. 바로 이때, 한 사람이 회사 문을 두드립니다. 김정수, 당시 34세의 전업주부였습니다.
김정수 부회장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나왔습니다. 1994년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의 장남인 전인장 회장과 결혼한 뒤, 4년간 가정에만 전념했는데요. 시댁 기업이 무너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1998년 2월, 삼양식품에 입사합니다.
서울예고 출신답게 미적 감각이 남달랐던 김 부회장은 삼양라면의 패키지 디자인을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갓짬뽕', '맛있는라면' 같은 제품명도 그녀가 직접 지었다고 해요. 2001년 영업본부장 전무, 2002년 부사장, 2010년 사장으로 올라가면서, 삼양식품 부활의 핵심 인물로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래도 회사 사정은 여전히 빠듯했습니다. 2세 경영이 시작된 2010년 이후 영업이익은 141억원에서 2012년 76억원으로 반 토막이 났고, 2013년에는 오뚜기에 밀려 라면 시장 3위까지 내려갔습니다. 삼양식품에는 뭔가 반전의 카드가 절실한 시점이었습니다.

2011년 초의 일입니다. 김 부회장은 고등학생이었던 딸과 함께 서울 명동을 걷고 있었습니다. 한 불닭 가게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스트레스가 풀린다"며 즐겁게 먹고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에서는 불닭, 불막창, 매운 등갈비찜 같은 매운 음식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강렬한 매운맛을 라면에 넣으면 어떨까?"
김 부회장의 이 물음표가 불닭볶음면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사실 원주 연구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닭갈비 볶음면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개발자 원주연 연구원은 춘천 근처에서 닭갈비 사리를 볶아 먹으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여기에 김 부회장의 "불닭맛으로 가자"는 선택과 맞물리면서,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됩니다.
개발 과정은 치열했습니다. 김 부회장과 마케팅 부서, 연구소 직원들은 전국의 불닭, 불곱창, 닭발 맛집을 돌아다녔습니다. 세계 각국의 매운 고추를 분석하고, 한국의 청양고추와 멕시코의 하바네로, 베트남 고추를 배합했습니다. 1년여의 개발 기간 동안 투입된 닭만 1200마리, 양념은 2톤에 달했습니다.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닭 이야기만 나와도 구역질을 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고, 위장이 안 좋아진 연구원도 있었다고 합니다. 불닭을 출시하기 위한 연구원들의 열정과 노력이 대단했던 것이죠.
삼양식품은 이 과정에서 국내 라면업계 최초로 매운맛을 수치화한 '스코빌 지수'를 도입했습니다. 그리고 2012년 4월, 마침내 스코빌 지수 4404를 자랑하는 불닭볶음면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처음부터 잘 나간 건 아닙니다. 당시는 '하얀 국물' 라면이 대세였고, 매운 볶음면은 생소한 장르였습니다.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2012년 여름부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 번 먹으면 자꾸 생각난다"는 입소문이 퍼진 거예요. 캡사이신의 강한 매운맛은 사실 '통각', 그러니까 일종의 고통인데요, 뇌가 이를 이겨내려고 엔도르핀과 도파민을 분비하면서 묘한 중독성이 생기는 겁니다. "맵다 맵다 하면서도 또 찾게 되는" 이 특유의 매력이 마니아층을 만들어냈어요.
2013년 5월, MBC '나 혼자 산다'에서 배우 이성재가 불닭볶음면에 삼각김밥과 스트링 치즈를 곁들여 먹는 모습이 방영됩니다. 이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꿀조합' 문화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합니다. 스트링 치즈를 얹어서 매운맛을 잡는 조합, 참치마요를 섞는 조합, 계란을 올리는 조합 등등, 소비자들이 스스로 자기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SNS에 올리기 시작한 거예요. 불닭볶음면은 그냥 '먹는 음식'이 아니라 '콘텐츠'가 된 겁니다.
진짜 전환점은 2014년이었습니다. 해외 유튜버들이 불닭볶음면을 먹으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울고, 웃는 영상, 이른바 '파이어 누들 챌린지'가 유튜브와 틱톡 같은 숏폼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중요한 건, 이것이 삼양식품이 돈을 들여 기획한 마케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시청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놀이 문화였어요. "나도 이 매운 라면에 도전해보겠다"는 호기심이, 영상을 보는 사람을 다시 도전자로 만들고, 그 도전이 또 새로운 영상이 되는 선순환이 생겨난 거죠.
한국에서 매운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원래 일종의 놀이 문화이기도 합니다. 친구끼리 "누가 더 잘 버티나" 겨루고, 매운 걸 먹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말하는 게 한국 음식 문화의 한 부분이잖아요. 불닭볶음면은 이 문화를 라면 한 봉지에 담아서, 전 세계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바꿔놓은 셈입니다.
삼양식품은 이 흐름을 잘 살렸습니다. 까르보불닭, 치즈불닭, 핵불닭, 하바네로라임, 야키소바불닭 등 각국의 식문화를 결합한 다양한 제품을 내놓으며 불닭 브랜드를 넓혀갔어요. 특히 까르보불닭볶음면은 미국에서 품절 사태를 일으켰고, 유명 래퍼 카디 비가 30분을 운전해서 사러 갔다는 일화가 뉴욕타임스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수출 초기인 2014년에는 KMF 할랄 인증을 받아 동남아 시장의 문을 열었고요.
숫자를 보면 이 성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집니다. 불닭볶음면은 약 100개국에 수출되고 있고, 출시 이후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 90억 개를 돌파했습니다. 게다가 작년 관세청 데이터에 따르면 한국 라면 전체 수출의 67% 이상을 삼양식품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하나의 브랜드가 한 나라의 수출 실적을 이 정도로 이끄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봐도 드문 일이에요.

이런 성장은 주가에도 고스란히 반영됐습니다. 2016년 말 4만원대였던 삼양식품 주가는 2025년 5월 100만원을 돌파하며 '황제주'에 올랐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시가총액 10조원을 넘기며 대한민국 식품업계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한때 라이벌이었던 농심 시가총액의 4배 이상을 벌자, 투자자들은 삼양식품을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에 빗대어 '면비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2025년 연간 실적을 보면 매출 2조3518억원, 영업이익 5242억원으로 사상 최대입니다. 영업이익률이 22%를 넘는데요, 다른 식품기업들의 영업이익률이 5%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몇 배나 높은 수준이에요. 비결은 해외 매출에 있습니다. 삼양식품 전체 매출에서 해외가 차지하는 비중이 84%가 넘거든요. 불닭볶음면은 해외에서 프리미엄 가격에 팔리면서도 늘 공급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생산 능력 확대도 빠르게 진행 중입니다. 2025년 6월 밀양 2공장이 가동을 시작하면서 연간 라면 생산 능력이 18억 개에서 약 25억 개로 늘었고, 중국 저장성 자싱시에는 첫 해외 공장이 건설 중이에요. 2027년 완공되면 연간 8억4000만 개의 불닭볶음면을 현지에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올 1월에는 서울 명동에 새로 지은 15층짜리 본사 건물로 28년 만에 이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김정수 부회장이 불닭볶음면의 아이디어를 떠올린 바로 그 거리죠.

이제 김정수 회장 앞에는 더 큰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불닭의 성공을 어떻게 오래, 안정적으로 이어갈 것이냐는 문제인데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불닭이라는 단일 브랜드에 대한 높은 집중도입니다. 삼양식품 해외 매출의 80%가 불닭에서 나옵니다.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소비자 취향이 바뀌거나 경쟁 제품이 치고 올라올 가능성은 항상 있죠. 삼양식품이 최근 소스, 스낵, 간편식 등으로 제품군을 넓히고, 우지 파동의 명예 회복을 내건 '삼양1963'이라는 프리미엄 라면을 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른 식품 규제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입니다. 2024년 덴마크에서는 불닭볶음면 일부 제품이 캡사이신 수치가 너무 높다는 이유로 리콜됐다가, 검사 방식의 오류가 밝혀지면서 리콜이 철회된 적이 있어요. EU에서는 2026년부터 포장 폐기물 규제(PPWR)가 본격 시행되면서 친환경 패키징이 수출 허가의 조건으로 바뀌고 있고요. 나라별로 라벨링 기준과 영양 표시 규정이 다르기 때문에, 수출국마다 맞춤 대응 체계를 갖추는 게 필수적인 시대가 됐습니다.

불닭볶음면의 성공은 삼양식품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K푸드 전체의 가능성과 과제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거든요.
2025년 K푸드 수출액은 사상 최초로 100억달러를 돌파했습니다. 라면이 선두를 달리고, 김, 과자, 아이스크림, 만두 등이 뒤를 잇고 있어요. K드라마와 K팝이 만들어낸 문화적 관심이 음식 소비로 이어지는 구조, 이른바 '콘텐츠 경험에서 온라인 구매, 그리고 반복 소비'로 연결되는 흐름이 단단하게 자리 잡은 겁니다. 영국의 주요 외식 트렌드 기관들은 2026년을 "K푸드가 주류 식문화로 전환되는 원년"이라고까지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장이 계속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업 차원에서 가장 시급한 건 해외 현지 생산 기반을 넓히는 일입니다. 한국에서 다 만들어서 수출하는 구조는 물류비, 환율, 무역 환경 변화라는 세 가지 변수에 동시에 흔들릴 수 있거든요. 삼양식품이 중국 자싱에 해외 공장을 짓고, 농심이 미국과 중국에 공장을 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앞으로는 동남아, 중동 같은 성장 시장에도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안정적인 공급이 가능해질 거예요.
현지화의 깊이도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불닭볶음면이 까르보, 하바네로라임, 야키소바 등 각국의 식문화를 결합한 제품을 낸 건 좋은 본보기인데요, 이제는 제품 맛뿐 아니라 포장 단위, 유통 채널, 마케팅 방식까지 현지 소비자의 생활 패턴에 맞추는 수준이 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비건, 저나트륨 라인이 경쟁력이 되고 있고, 중동에서는 할랄 인증이 시장 진입의 출발점이에요. 같은 제품이라도 지역마다 전혀 다른 접근이 필요한 거죠.
정책적으로도 뒷받침이 중요합니다. 각국의 식품 안전 기준, 라벨링 규정, 환경 규제가 해마다 복잡해지고 있는데, 개별 기업이 모든 나라의 규정을 실시간으로 추적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같은 기관이 주요 수출국의 규제 변화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기업에 빠르게 전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해요.
마지막으로, 불닭볶음면이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K콘텐츠를 통해 관심을 끌고, SNS와 숏폼을 통해 소비자가 직접 문화를 만들게 하고, 그 문화를 다시 제품 확장으로 이어가는 선순환 구조. 이걸 라면 하나의 우연한 성공으로 끝내지 않고, K푸드 전체의 해외 진출 모델로 체계화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의 과제입니다.
앞으로 한국의 ‘매운맛’이 얼마나 더 멀리 뻗어나갈 수 있을지, 이제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