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前 한국금거래소 총괄사장

최근 한국은행이 13년간 동결해온 금 보유량(104.4t)을 중장기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 또한 금을 통화 주권을 지키는 전략 자산으로 재정의하고 안정적인 외환 관리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조치로 해석된다.
특히 한국거래소(KRX) 금 현물 시장의 연간 거래대금이 사상 최대인 5조원(2025년 10월 기준 누적)을 돌파하며 급성장하는 시점에서, 현재 KRX는 금지금 공급 안정성을 제고한다는 명분 아래, 런던귀금속협회(LBMA) 인증을 받은 글로벌 제련업자의 시장 참여를 전면 허용하는 규정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시장의 외형적 성장 뒤에 가려진 ‘기울어진 운동장’의 실상은 국내 귀금속 산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현재의 제도는 국내 업체에 역차별적인 구조를 고착화하며, 결과적으로 우리 금 산업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병목 현상을 초래했다.
이는 전형적인 정책적 오만, 즉 ‘휘브리스’이다. 공급망을 단순히 효율성의 잣대로만 바라보고 해외 거대 제련사를 끌어들이면 수급 불균형이 해소될 것이라 믿는 근시안적 사고다. 하지만 이 조치는 금 시장의 본래 목적인 ‘고금 양성화’와 ‘국내 산업 육성’이라는 뿌리를 스스로 뽑아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지점은 국내외 업체 간의 불평등한 공급 조건이다. 현재 해외 LBMA 회원사는 별도의 검증 절차 없이 ‘주물바(Cast Bar)’ 형태로 무관세 입고가 가능하다. 반면, 국내 정련업체들은 조폐공사의 엄격한 검사를 거친 ‘민트바(Mint Bar)’ 형태만을 공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무형의 시간과 비용은 고스란히 국내 업체의 몫이다. 이는 동일한 출발선에서의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또한, 국내 업체가 해외 LBMA 주물바를 수입해 공급하면 관세와 부가세가 자금 회전의 발목을 잡아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구조적 모순이 KRX 금 시장의 설립 목적인 ‘음성 시장 양성화’를 저해한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국내 금 거래의 60% 이상이 지하 경제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민간이 보유한 약 800t의 금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일 ‘유인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800t이라는 거대한 민간 자산이 양성 시장으로 흘러나오게 하려면, 국내 업체들도 주물바 형태로 공급할 수 있도록 규제의 문턱을 낮춰야 한다. 동시에 ‘의제매입세액 공제’와 같은 전향적인 세제 개선을 통해 음성 시장으로 흐르는 금의 물길을 KRX라는 양성 시장으로 돌려놓는 정책적 결단이 필요하다.
해외 자본으로부터 우리 시장을 방어하고 국내 산업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질서 설계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켜온 경제 주권은 글로벌 경제의 파고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불공정한 제도적 격차를 방치한 채 해외 업체에 시장을 내어주는 것은 국부 유출을 방조하는 것과 다름없다. 거시적인 측면에서 금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제도 정비 유예 기간’이 보장돼야 한다. 이를 통해 국내외 업체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레벨 플레잉 필드(Level Playing Field)’를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