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휘은의 AI 이야기] 완벽하지 않기로 한 사람들

비 완벽이라는 이상향

▲반휘은 칼럼니스트/ AI컨설턴트. (출처=본인 제공)
한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잘 정리된 세계에 살았다. 집도, 얼굴도, 일상도, 심지어 감정까지 깔끔해야 했다. 무엇이든 설명 가능해야 했고, 어딘가에 올려도 무리가 없을 만큼 단정해야 했다. 흐트러짐은 관리 실패처럼 취급됐고, 일관성은 성실함의 증거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요즘은 그 ‘정리된 상태’ 자체가 버거워 보인다. 부스스한 머리, 어지러운 책상, 가방 안에서 몇 달째 굴러다니는 영수증. 일부러 마감을 덜 한 듯한 키링 하나가 흔한 가방을 개인적인 이야기로 바꾸고, 흔들린 프레임에 윤곽이 번진 사진이 오히려 ‘느낌 좋은 컷’으로 소비된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끝까지 설명되지 않은 말, 어색하게 남겨진 장면, 일부러 미완처럼 보이는 태도들은 너무 빨리 완성되어버리는 세계에 대한 반감처럼 보인다. 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 최근의 문화적 분위기에서 가장 큰 공통점을 꼽자면 일관성보다는 변주가, 완결보다는 지연이 눈에 띄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메시(messy)’하다고 통칭하는 이 흐름에서 주목할 점은 왜 지금 이런 미학(aesthetic)이 다시 호출되고 있는가다.

흔히 메시코어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미완을 숭배하는 미학이라기보다, 완벽을 기본값으로 요구하는 세계에 대한 피로에서 출발한다. 핵심은 끝내지 않음이 아니라 비 완벽성이다. 삐뚤어진 선, 어색한 조합,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아직 덜 됐다는 신호가 아니라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태도에 가깝다. 메시코어는 인간다움을 과시하려는 제스처라기보다, 완벽을 전제하는 기준에서 한발 물러나려는 선택이다. 다만 자동 완성과 최적화가 일상이 된 지금, 그 비 완벽함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점점 더 의식적인 태도로 바뀌고 있다. 메시함을 비롯해 최근 다시 주목받는 인디 슬리즈(indie sleaze)의 재등장, 즉흥성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whimsical), 예상치 못한 일탈과 도전에서 오는 즐거움(side quest) 등 ‘굳이’ 싶은 일들을 향한 낭만화 또한 언제나 정돈된 상태로 존재해야 했던 정체성에 대한 누적된 피로의 결과에 가깝다. 모든 선택이 효율과 결과로 환산되는 세계에서 굳이 딴길로 새는 시간은 하나의 저항처럼 기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간 주류 미감은 ‘클린함’을 이상으로 삼아왔다. 깔끔한 인테리어, 잡음 없는 피부, 루틴화된 일상, 매끄럽게 이어지는 자기 서사는 단순히 예쁘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의 태도이자 윤리처럼 여겨졌다. 정리된 삶은 자기 관리의 증거였고, 차분함은 능력의 상징이었으며, 일관성은 신뢰의 조건이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결코 자연스럽게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정을 관리하고, 이미지를 조율하고, 말의 톤을 맞추고, 삶의 흐름을 설명 가능한 서사로 다듬는 일은 세심한 조율이 필요한 작업이지만, 클린한 이미지의 승부수는 이 모든 것이 태생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여야 한다는 근간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느새 살고 있다기보다 스스로를 운영하고 있었다. 자아는 경험의 주체라기보다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다뤄지기 시작했다.

이 피로는 구조적인 범위에서도 존재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주체는 소셜미디어의 확산을 통해 점점 더 ‘읽히는’ 존재가 되었다. 가시성은 일관성을 전제로 주어지고, 자기표현은 수치와 지표로 환산되는 규격 속에서 깨끗한 색감은 압축에 강하고, 반복 가능한 루틴은 알고리즘에 잘 맞으며, 잡음 없는 얼굴은 확장성이 높다. 클린 미감이 지배적인 이유는 시각적인 만족도를 떠나 시스템 안에서 가장 매끄럽게 번역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이 잘된다고 오래 유지되는 미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들의 동조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하얗고 똑 떨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만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왜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정리된 상태를 유지하려 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라캉의 말대로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욕망을 경유한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타자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먼저 학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깨끗한 미니멀리즘 미감과 완결된 자기 서사가 강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요소들은 모두 단순한 취향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주체를 상징하는 코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메시함은 질서에 실패한 상태가 아니라, 욕망이 포획되는 회로와 완결을 강요하는 감각 훈련 모두에 동시에 어긋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것은 무질서가 아니라, 너무 빨리 닫혀버리는 세계에 대한 미세한 거부다.

이 지점에서 아도르노의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른다. 아도르노가 경계한 것은 문화가 대중에게 지나치게 매끄럽게 이해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이었다. 갈등은 해소되고, 불편함은 봉합되며, 모든 것은 빠르게 의미를 회수할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되는 상태에서 관객에게 남은 자유의 공간은 극히 협소하고 제한적이다. 스크린이 꺼진 뒤 잔재하는 의문은 새로운 의미의 씨앗을 심을 수 있는 토양이 되지만, 이를 차단한 ‘깔끔한’ 콘텐츠에서는 대중이 각자의 취향을 가꿀 시공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완결을 기대하도록, 불협화음을 불편해하도록, 의미가 남아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하도록 훈련된 관객에게 의미의 재생성은 기대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오늘날의 ‘깨끗한’ 미감과 AI가 만들어내는 완성도 높은 이미지들은 이 논리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결과에 가깝다. 이미지와 서사는 너무 빨리 닫히고, 해석은 미리 정리되어 있으며, 남겨진 잔여는 없다. 메시함이 불편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조화를 거부하는 메시함은 이미 완결성에 길들여진 관객의 눈에 시선을 뗄 수 없는 위험함으로 보인다.

문화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반작용은 낯설지 않다. 질서와 합리성이 과잉될 때, 문화는 늘 의미를 흐트러뜨리는 방식으로 반응해왔다. 20세기 초 다다이즘이 무의미한 언어와 파편으로 가득 찼던 것도, 초현실주의가 무의식과 자동 기술에 집착했던 것도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잘 정리된 세계가 이미 충분히 폭력적인 실패로 번질 수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전후 미술 또한 과정과 흔적, 잔여물을 강조하며 명확한 결론보다 확장된 의미를 추구했다. ‘친절’하고 직관적인 설명의 소실은 보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해보다 체류를 요구했다. 의미의 지연이 드러난 것이다.

대중문화 역시 같은 흐름을 따른다. 2000년대 초반 파파라치 사진이 강력했던 이유는 자연스러워서가 아니라,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다시 유행으로 돌아오고 있는 헤로인 시크의 선두 주자였던 케이트 모스의 흐트러진 모습은 해석을 요구하는 대신, 사진 속 모든 요소를 종합해 그 상태 그대로의 분위기를 하나의 완성된 상품으로 포장했다. 라나 델 레이의 반복된 지연과 미완의 결과물은 개인적 문제라기보다 시간에 대한 저항처럼 읽히고, 웨딩드레스에 담배 한 개비를 문 찰리XCX의 페르소나는 자아 성찰적 에세이를 업로드하는 ‘지적’ 이미지와 혼합해 입체성을 부각한다. 민낯과 맨발로 무대와 인터뷰 현장을 오가는 미국의 틱톡커 출신 신예 팝스타 애디슨 레이의 급격한 이미지 변주 또한 진솔함의 회복이라기보다, 완결된 인플루언서 서사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혼란과 명백히 다른 ‘정리되지 않음’이다.

AI는 이 흐름 속에서 결정적인 압박으로 작동한다. 생성형 시스템은 완성도를 자동화했다. 이미지도, 문장도, 분위기도 너무 빨리 끝난다. 매끄러움은 사람들이 몇 시간씩 공들여 공간을 꾸미고 편집해서 나온 노력의 산물이 아닌 기본값이 되어버렸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소멸은 복제를 벗어나 시간의 문제로 나타난다. AI 이미지가 불편한 이유는 시간이 개입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떤 맥락에서 생성됐는지에 대한 사고의 기회도 없이 이미지는 하늘에서 떨어져 완성된 상태로 환히 웃으며 대중에게 여섯 손가락을 흔든다. 이런 조건에서 메시함은 진정성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으로 작동한다. 구겨진 옷, 어수선한 공간, 늦게 도착한 작업, 설명되지 않은 태도들은 모두 ‘시간이 개입했다’는 표시다. 메시함은 아우라를 복원하는 대신, 아우라가 필요했던 지연, 마찰,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조건을 대중들에게 다시 떠올리게 한다. 완벽함만을 허용하던 공간에서 비 완벽성을 드러내야만 ‘진짜’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 또한 특수적인 딜레마에 빠진다. 드보르의 진단이 그러했듯, 스펙터클 사회에서 저항은 제거되는 대신 빠르게 이미지로 흡수되어 새로운 (소비의) 흐름이 된다. 반항은 스타일이 되고, 불일치는 장르가 되며, 혼란조차 소비 가능한 질감으로 바뀐다. ‘Messy-core’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메시함은 이미 하나의 코드가 된다. 그래서 지금의 메시함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체제를 벗어나지 못한 저항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 어디까지 흐트러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흐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완결에 대한 피로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메시함은 해방을 약속하지 않는다. 혁명도, 진정성의 회복도 더군다나 아니다. 오직 판단을 늦출 뿐인 이 ‘미학’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를 선뜻 보임으로써 개인을 잠시 머물게 한다. 끝내지 않음으로써 평가를 유예한다. 모든 것이 너무 잘 끝나는 세계에서, 끝나지 않음은 하나의 숨구멍이 된다. 그래서 지금의 messy core는 굳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는 태도에 가깝다. 그것은 혼란을 찬양하는 미학이 아니라, 완벽을 기본값으로 설정해 온 세계에 대한 피로의 표현이다. 모든 것이 자동으로 완성되는 시대에, 비완벽을 선택하는 일만큼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는 ‘자유’다.

저자 소개

반휘은은 글로벌 AI 거버넌스와 신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정책 컨설턴트이자 저술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디지털 인문학, 미디어철학, AI윤리를 전공하며 석사과정을 마친 후, 뉴욕 유엔본부의 (전)기술특사실 (현)디지털과 신기술사무국(전 Office of the Secretary-General’s Envoy on Technology, 현 Office for Digital and Emerging Technologies)에서 AI 정책 연구와 분석을 주도했다. 안보, 에너지, 노동, 건강, 법의 지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거버넌스를 위한 전략적 프레임워크를 개발했으며 20회 이상의 고위급 자문 회의를 주관하며 AI 정책을 구체화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주요 산업 리더들과 협력하여 AI 거버넌스의 글로벌 표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반휘은은, 디지털 윤리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현재는 AI 거버넌스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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