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좌든 우든 배타적 권위주의로 흘러
부단한 개선과정 ‘민주주의’ 깨닫길

과도한 이상주의는 오히려 극단적 반동(反動)으로 가기 쉽다.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너무 크면 현실에서 실망감도 크게 마련이고, 그 실망감은 자칫 체념하듯이 권위주의로 돌아서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지나친 사랑은 극한 증오로 이어질 수 있고, 비현실적인 희망이 결국 모든 걸 포기하는 절망으로 변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독일 태생의 로버트 미헬스(R. Michels)는 사민당에서 활동한 낭만적 개혁론자였으나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비관론자가 되었다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가입한 인물이다. 1911년 발간한 ‘정당론’에서 미헬스는 어떤 민주적 조직도 필연코 과두제로 변질된다는 ‘철칙’을 주장했다. 그의 비판적 분석은 자연히 민주주의 불가론으로 이어졌고, 이상적 꿈이 깨진 그는 반대 극단으로 돌아 파시즘 추종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전면적 실망으로 인해 강한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지상주의에서 탈출구를 찾는 반동적 심리를 갖게 된 것이다.
미헬스가 파시스트당에 가입한 1924년 이후 백 년이 넘은 오늘날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득세하고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학계·유색인종·이민자·외국인 등에 대한 적개심을 퍼뜨리고 법·제도 틀도 무시하며 독불장군식 일방주의를 내세우는데도 그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앞장서는 인사들이 많다.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연합 국가들에서 노골적인 극우 표방 정당들이 지지세를 넓히고, 칠레, 헝가리, 튀르키예 등 무늬만 민주주의인 곳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포퓰리즘 권위주의에 매달리고 있다. 이런 국가들에서 비민주적 세력이 판칠 수 있는 건 민주주의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의 반동적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헬스의 후계자들은 극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극좌에도 있다. 사실, 좌우나 진보·보수와 같은 이념으로 분류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권위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 중엔 특정 이념 교리를 따르기보단 심리적 불안 상태에서 무언가에 의존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자기가 꿈꾼 이상과 실제 현실이 너무 달라 상실감·좌절감·무력감을 느낀다면(아노미 현상) 아예 현실에 관심을 끄고 침잠하기도 하고 권위주의적 철권 지도자에 의지해 심리적 중심을 잡고 위안을 찾기도 한다. 둘 다 문제지만 후자가 더 두드러지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심리적 불안으로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에도 많다. 예를 들어 ‘윤 어게인’ 세력과 ‘개딸’ 집단은 각기 특정 인물을 지도자로 맹종하며 폐쇄적 배타주의와 경직된 집단주의를 고수한다. 이들이 미헬스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감에 권위주의로 돌았는지, 처음부터 권위주의적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이들이 정파 대결의 양극단에서 상대를 인정하기는커녕 악마화하고 자기편의 무오류성을 일사불란하게 외쳐댐으로써 미헬스가 가입했던 파시스트당과 성격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의 수령 전체주의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상 여러 병폐가 있어도 민주주의를 포기할 순 없다. 미헬스는 너무 이상적으로 완벽한 개혁을 꿈꾸다가 민주주의의 과두제적 변질을 너무 전면적으로 일반화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너무 완전히 포기하며 파시즘을 심리적 마약으로 오용했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은 그 후의 세계 역사가 잘 보여준다. 인간이 만든 것 중에 완벽한 건 없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보단 낫다. 민주주의의 현실적 문제점들이 권위주의로의 반동적 귀의를 정당화하진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결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니고 수많은 논란과 한계를 조화롭게 풀어가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다. 극단적 권위주의로 민주주의 현실을 극복하겠다는 착각에 빠진 미헬스 후계자들이 유념해야 할 상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