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는 입으로 한다지만 때로 국민은 말 대신 계란을 든다. 말은 안 먹히고 사인은 전달되지 않을 때 가장 일상적인 물건 하나가 거리의 언어가 된다. 정치계에서 벌어진 ‘계란 투척’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밥상 위 단백질이 항의의 도구로 민심의 경고음으로 전환되는 흐름에는 ‘왜 지금 이 시점인가’에 대한 정치적 맥락이 짙게 배어 있다.
계란은 싸고 가볍고 맞아도 큰 상처가 없다. 한 정치학자는 계란을 “분노의 최소 단위”라고 설명한다. 돌은 폭력이 되지만 계란은 항의다. “선을 넘지 않겠다”는 의도가 담긴 국민의 나름대로 절제된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정치 현장에서 계란이 등장할 때는 대개 세 가지 조건이 겹친다. 불통이 누적됐을 때, 생계가 흔들릴 때, 정치권이 무감할 때이다. 부동산 정책의 혼선, 세제 개편의 갈지자 행보, 반복된 대국민 사과에도 바뀌지 않는 기조. 정치는 듣는 척하지만 바꾸지 않는다. 그때 계란이 등장한다. 국민 입장에서 계란은 ‘더 이상 말로는 안 되니 보여주겠다’는 이미지 기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다.
정치가 말을 무시하면 국민은 이미지를 던진다. 언론 보도에 남고 SNS에 퍼지고 검색어에 오르는 순간부터 계란은 하나의 메시지다.
계란은 한번 터지면 그 순간이 캡처된다. 영상은 SNS에 남고, 정치인은 그 장면을 두고두고 마주해야 한다. 한 정치평론가는 “계란은 던지는 순간보다, 남겨진 이미지로 오래 기억된다”고 말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대응이다. 같은 계란을 맞아도 어떤 정치인은 웃고 어떤 정당은 고소장을 낸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대응에서 갈린다. 유권자가 보고 있는 건 맞았느냐가 아니라 맞고 난 뒤 뭐라고 했느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차례 계란을 맞은 뒤 농담 한마디로 사건을 넘겼다. 이 장면은 오히려 지지층 결속의 계기로 작용했다. 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은 세 차례 맞았다. 대부분은 정권 지지율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계란은 곧 민심의 온도계로 읽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앞 계란 투척은 ‘가시권 밖에 있는 권력’에 향한 분노의 상징이었다. 계란은 거기에 날아가는 것으로 충분했다.
계란이 던져졌다는 건 정치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폭력은 원치 않는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국민은 ‘돌’이 아닌 ‘계란’을 들었다. 법적으로는 위법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최소한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도 있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항의의 이유를 읽고, 설득의 복원을 시작하는 것. 정치인은 계란의 유통기한보다 빠르게 응답해야 한다. 정치권은 자칫 “폭력엔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 들기 전에 왜 계란이 날아들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국민은 말 대신 계란을 던졌지만 여전히 대화를 기다리고 있다. 이 계란은 항의지만 아직 희망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