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 ‘한일령(限日令)‘ 시대, K콘텐츠가 생존하는 길

임대근 한국외대 컬처테크융합대학장 / 한국영화학회장

中 문화산업, 시장보다 정치 우선
韓, 반사익 기대하면 위험한 착각
보편적 매력 갖춘 콘텐츠 집중을

일본 가수 오쓰키 마키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불이 꺼지고 마이크가 나가버렸다. 가수는 당황한 채 무대에서 내려왔다. 상하이에서 열린 ‘반다이 남코 페스티벌 2025’ 이야기다.

오쓰키는 재패니메이션 ‘원피스’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개입 가능” 발언이 몰고 온 파장이다.

‘한일령(限日令)’이라는 유령이 중국과 일본 사이를 배회하고 있다. 무대 위의 가수가 노래를 부르던 중 스태프에 의해 퇴장당하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없는 시각의 충격이었다. 중국 내 일본 가수의 공연은 물론, 예정된 영화와 뮤지컬도 줄줄이 취소됐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발 일본행 항공편은 904편이나 운항 중단을 결정했다.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불과 몇 년 전,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중국 시장에서 철퇴를 맞았던 우리의 한한령(限韓令)을 떠올리게 하는 데자뷔다.

일부에서는 조심스럽게 반사이익을 거론한다. 일본 문화콘텐츠가 빠진 거대한 중국 시장의 공백을 K콘텐츠가 메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다. 얼핏 타당해 보인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으로서 정서적 장벽이 낮고, 품질 면에서 일본의 유일한 대체재가 한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당겨 말하면, 일본의 불행을 우리의 기회로 삼으려는 기획은 위험천만한 착시 현상이다. 지금은 일본의 위기에서 반사이익을 살필 때가 아니라, 차이나리스크의 본질을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첫째, 중국 문화산업은 시장 논리보다 정치 논리가 우선하는 곳이다. 어제 한국을 향했던 칼날이 오늘 일본을 향하고 있을 뿐, 그 칼자루는 여전히 중국 당국이 쥐고 있다. 일본 문화콘텐츠가 퇴출당하는 이유는 품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단지 외교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최근 다소 호전되고 있는 한중 관계가 또 삐걱거린다면 K콘텐츠 역시 언제든 거부당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치적 입김에 따라 수시로 문을 걸어 잠글 수 있는 시장을 상수로 두고 사업을 기획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둘째, 중국은 한한령이든 한일령이든 떠들썩한 콘텐츠와 이데올로기 집약형 콘텐츠를 중심으로 응징을 가했다. 출판, 영화, TV드라마 등이 대표 장르다. 가수의 노래를 끊고 무대에서 끌어내리는 충격 효과는 대중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콘텐츠에 대해 보란 듯이 보복을 가하는 방식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만화를 비롯해 캐릭터, 콘텐츠 자원 등 다른 장르의 일상적인 교역은 지속되면서 더욱 확대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실속을 챙길 필요가 있다.

셋째, ‘반일’의 빈자리를 꼭 ‘친한’이 채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근 중국은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는 애국주의 마케팅과 내부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 일본 문화가 사라진 자리는 한국 콘텐츠가 아니라, 중국 자체 제작 콘텐츠나 공산당의 입맛에 맞는 선전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 당국이 아무리 문화산업을 진흥한다고 해도, 이를 판단하는 절대 기준은 이념이고, 부가 기준이 시장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일령’ 사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중국이라는 지정학적 변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콘텐츠의 본질에 집중하면 된다. 우리는 이미 적잖은 경험을 쌓아 왔다. ‘강남스타일’ ‘오징어 게임’ ‘기생충’을 비롯해 BTS의 성공은 중국 시장을 타깃으로 삼은 현지화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이야기로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했기에 가능했다. 전 세계가 열광하니 이른바 ‘만리방화벽(Great Firewall)’ 안의 중국 대중도 우회 경로를 통해서 우리 콘텐츠를 즐겨 왔다.

일본이 겪고 있는 ‘한일령’의 찬바람은 당분간 더 매서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문화콘텐츠의 위기는 우리에게 기회가 아니라 엄중한 경고다. 그 경고는 특정 국가와의 외교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K콘텐츠가 가야 할 길은 중국의 검열 기준에 맞춰 일본의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북미, 유럽, 중동, 동남아를 아우르는 보편적 매력으로 무장하여, 중국이 문을 닫더라도 아쉬울 것 없는 슈퍼 IP(지식재산)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것이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K콘텐츠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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