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날마다 사과 한 알을 먹는 까닭

장석주 시인

젊은 날엔 여름이 좋았다. 목덜미에 데일 듯 떨어지는 뜨거운 햇볕과 장엄하게 빛나는 구름들, 그리고 먼 고장의 바다는 상상하는 것만으로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기 했다. 나이가 드니 가을이 더 좋아졌다. 한결 유순해진 햇빛을 떠안은 채 조용히 윤슬을 뒤채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 단풍 든 느티나무 잎들이 바람을 타고 되새 떼처럼 일제히 땅으로 내려앉는 심상한 풍경도 마음에 든다. 그밖에 가을이 좋은 이유. 그건 마침내 새로 수확한 사과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인이 선물로 보낸 사과 한 상자가 도착했다. 사과는 땅의 정수, 박명의 빛과 염천의 열기, 빗방울의 반짝임, 오래 숙성된 풍미와 뜻밖의 기쁨, 그것의 총합이다. 젊은 날엔 사는 게 질식할 듯 무겁고 건조했다. 한마디로 사과의 풍미 따위를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다. 사과를 좋아한 것은 머리숱이 부쩍 줄어든 중년 이후다. 가끔 단단한 사과를 손에 쥐고, ‘왜 사과를 좋아하게 됐지?’ 하고 자문하지만 딱히 그 이유를 말하기는 어렵다. 비로소 사과의 진가와 풍미에 눈을 떴기 때문일까?

사과는 아삭거리는 식감도 좋고 저칼로리에 영양소도 골고루 함유된 과일이다. 사과 과육엔 식이섬유, 칼륨 등이 듬뿍 들어 있고, 거기에 항산화 작용을 하는 폴로보노이드와 폴리페놀도 있다. 사과의 풍부한 영양소와 그 효능 덕분에 감기 같은 잔병 없이 좋은 건강을 유지했을 테다. 사과나무의 수액과 땅의 성분과 햇빛이 둥글게 빚은 사과가 내 앞에 있다. 이 사과는 우리 생이 불가피하게 품었을 고난과 불행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침에 사과 한 알씩 먹는 날들은 대체로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날마다 사과 한 알을 챙겨먹고 종일 책에 빠져 지내는 내 전생이 혹시 중세 도서관의 늙은 사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내 행위가 다 선한 의지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사과를 먹으면 도파민이 터진 듯 기분이 좋아진다. 날마다 아침 먹기 전 사과 한 알씩 먹은 지 서른 해쯤 지났다. 사과는 ‘My Favorite Things’ 중 하나다. 사과라는 낱말이 일으키는 쾌활한 기쁨뿐만 아니라 사과 한 알을 껍질째 아삭아삭 먹는 일이 큰 보람과 행복감을 주는 까닭이다. 사과 한 알을 먹는다는 건 내 행복의 가늠자다. 내게는 사과가 온다는 것이 별자리가 침묵 속에서 운행하는 지상에서 꽤나 놀라운 사건이다. 사과는 아무 근심 없이 맞는 일요일의 기쁨과 더불어 우리 내면에 깨끗한 삶에의 의지를 세운다.

기후변화 탓에 한반도가 더워지면서 사과 산지도 북상 중이다. 오래전엔 대구가 대표적인 사과 산지로 꼽혔다. 대구 여성들이 예쁜 건 사과를 많이 먹기 때문이란 말도 회자되었다. 지금은 중부 일대에서 사과를 많이 재배한다. 충주, 철원, 예산에서도 좋은 사과들이 많이 나온다. 지인이 보낸 사과는 문경에서 생산한 감홍사과다. 옛날에 먹던 사과는 대개 국광이나 홍옥, 부사 품종이었다. 요즘 사과는 홍로, 부사, 감홍, 시나노골드, 양광, 아오리 품종이 대세다. 사과를 먹는 건 내 아침의 의례다. 딱히 건강을 위해 사과를 먹는 건 아니다. 내게 사과는 하루의 기쁨, 잘 살아낸 하루에 대한 보상이다. 사과를 즐겨 먹는 사람은 의사를 만날 일이 적다는 사실은 덤처럼 따라오는 즐거운 일이다. 어린 자식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날마다 사과 한 알씩 먹는 습관을 물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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