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논단] 우리는 삼양라면에 빚을 지고 있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가난한 나라 배고픔에 시작한 사업
악의적 ‘우지파동’에 적자기업 전락
기업문화 혁신해 우량 기업 거듭나

한국 사회는 삼양라면에 몹쓸 짓을 했다. 그래도 삼양라면은 우리를 원망하지 않고 꿋꿋이 버텨냈다. 그리고 이겨냈다. 그래서 우리는 삼양라면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삼양라면의 시작은 지극히 애국적이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꿀꿀이 죽을 먹기 위해 장사진을 친 노동자들의 행렬이 발단이었다. 이를 본 한 기업인은 앞서 일본 연수 때 맛본 라면을 떠올렸다. 그가 바로 선린상고 출신으로 동방생명(삼성생명의 전신) 부사장까지 지낸 전중윤(1919~2014)이었다.

그는 값이 싸면서도 한끼 식사로 손색이 없는 라면으로 국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보겠다고 다짐했다. 42세였다. 전 회장은 서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인의 도움을 받아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 사장과 만나 기술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오쿠이 사장은 전 회장의 열정과 양심적인 모습에 반해 회사 비밀이었던 라면수프 배합 비율을 전달하기도 했다.

1963년 처음 선보일 당시 일본 라면의 중량은 85g, 삼양라면은 이를 100g으로 늘렸다.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더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가격도 당시 꿀꿀이 죽이 5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10원으로 책정했다. 담배 25원, 커피 35원이던 시절이었다. 라면값이 너무 저렴하다는 오쿠이 사장의 걱정에 전 회장은 “이 사업으로 돈을 얼마나 벌겠느냐? 식량난으로 어려운 한국 상황에서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과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라면의 발상에서 제조, 판매에 이르기까지 전 회장의 머릿속에는 가난한 나라의 배고픈 국민만이 있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결하던 시절, 라면은 체제 경쟁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북한의 이웅평 대령이 1983년 미그기를 몰고 남한으로 귀순했던 계기가 해안에 떠밀려온 라면봉지 때문이었다고도 했다. 그만큼 배고픔의 해결은 절박한 과제였고 삼양라면은 체제 경쟁의 승자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우리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성공의 적’이 너무 많았다. 1989년 검찰은 삼양라면이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우지(쇠기름)를 쓰고 있다며 기소했다. 일부 언론은 비누, 윤활유용 기름을 사용했다는 식의 자극적 보도를 쏟아냈고 전국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폭주하는 소비자들의 항의 속에 매대에서는 삼양라면이 서둘러 내려졌다. 당시 100만 박스 이상의 삼양라면이 폐기됐다고 한다. 시장점유율은 30%에서 순식간에 10%로 떨어졌고 1000명 이상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다. 권력의 오만, 언론의 무책임, 소비자의 불안이 결합된 한국 사회의 삼종 세트가 서민의 애환이 깃든 한 기업을 유린했다. 회사는 순식간에 적자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래도 삼양라면은 좌절하지 않았다. 한국 사회를 원망하지도, 자기 신세를 한탄하지도 않았다. 어렵지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어 다시 일어서자고 노력했다. 우선 지배구조를 단순화했다. 삼양 라운드스퀘어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어 선진화된 지배구조를 갖췄다. 연구개발에 힘을 쏟아 소비자의 입맛을 분석한 새 제품을 만들었다. ‘불닭볶음면’이라는 신제품은 도전에 소극적이었던 삼양의 기업문화를 혁신하면서 생긴 산물이었다. 그리고 좁은 국내시장을 벗어나 해외로 눈을 돌렸다. 2024년의 해외 매출은 1조3359억 원, 전체 매출의 77%였다. 올해는 80%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이 모든 전략의 기획과 실천을 책임지는 자리에 능력 위주의 담대한 승부를 걸었다. 창업자의 며느리, 김정수 부회장이 경영을 맡았다. 그녀는 오너이면서도 오너같지 않았고 전문경영인으로 분류되기에도 애매했다. 그럼에도 오너로서의 책임감은 발휘하고 전문경영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과시했다. 외신조차도 대부분의 대기업이 창업주의 남성 상속자들이 이끌고 있는 한국 산업계에서 며느리로서 기업을 회생시킨 것은 이례적이라고 놀라움을 표했다. 그리고 2024년에는 재계를 대표하는 한국경제인협회(전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단으로 합류해 경제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김정수 부회장의 삼양라면은 올해 11월 3일, 우지 파동이 발생한 날로부터 정확히 36년이 되는 날 우지를 쓴 라면, ‘삼양 1963’을 출시했다. 명예의 회복이자 창업정신의 귀환이었다. 마음속에 담아둔 기업가정신의 부활이기도 했다. 자신을 향한 웃음거리와 비난 속에서도 삼양라면은 기업을 온전히 지켜내고 키워서 사회에 되돌려줬다. 삼양라면에 그만큼 한국 사회는 큰 빚을 졌다. 이제는 ‘삼양 1963’을 끓여 먹으며 우리가 그 빚을 갚을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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