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기억의 예술

조현성 서예가ㆍ한국미협 캘리그라피 분과위원장

예술의 생명은 시간 속에서 자란다. 그중에서도 서예는 시간의 흐름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술이다. 서예의 가장 큰 힘은 ‘기억의 예술’이라는 점에 있다. 종이 위의 획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과 정서의 흔적이다. 필압의 강약, 속도의 변화, 먹색의 농담은 그 사람의 성정과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따라서 서예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내면을 계승하는 일이다. 현대의 시각예술이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표면적 감각에 치우친다면, 서예는 여전히 인간의 ‘심(心)’을 중심에 둔다. 붓이 종이를 스치는 순간, 먹의 번짐과 붓끝의 떨림 속에는 그 사람의 호흡과 세월의 무게가 스며 있다. 한 획의 시작과 끝에는 단순한 붓질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그것은 세월을 통해 완성되는 정신의 수양이며, 마음을 형상화하는 길이다. 같은 글자를 수없이 써 내려가면서도 매번 그 선은 다르다. 그 차이는 손끝의 감각이 아니라, 삶의 깊이가 쌓여 만들어낸 차이이다. 오랜 세월 정진할수록 필획이 단단해지고, 먹빛이 깊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은 과거의 모양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정신의 맥이다.

왕희지는 ‘난정서(蘭亭序)’에서 “세상이 달라지고 일이 변한다 해도 감흥을 일으키는 근원은 하나(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사진)”라 하였다. 서예의 전통 또한 그러하다. 시대가 변해도 그 중심에는 인간의 정서와 생명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전통의 계승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를 존중하는 일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전 세대가 쌓아 올린 정신과 미학을 이어받아, 다시 다음 세대로 전하는 인간 문화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행위이며 태도를 잇는 일이다.

디지털의 시대에 서예는 종종 ‘느린 예술’로 불린다. 그러나 그 느림이야말로 서예의 힘이다. 빠름이 효율의 미덕으로 여겨지는 오늘날, 붓을 들고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일은 마음의 속도를 되찾는 행위이다. 붓끝의 호흡은 잊혀 가는 집중과 몰입의 가치를 되살린다. 느림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고, 그 속에서 예술의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

한 사람의 필법 속에는 수많은 세대의 시간이 스며 있고, 그 시간의 축적이 바로 인간 문화의 뿌리를 이룬다.

서예는 결국 시간을 쓰는 예술이다. 그 한 획에는 인간이 쌓아온 정신의 역사와 문화의 체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오랜 시간을 품은 붓끝은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새기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왕희지의 말처럼 세상이 달라져도 감흥의 근원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전통이 이어지는 방식이며, 예술이 인간의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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