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택 경제칼럼니스트

당시 독일 기업가들은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지역사회와 노동자를 하나의 공동체로 여기며, 기술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했다.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라는 말은 단순한 상표가 아니라 책임과 품질에 대한 서약이었다. 이들은 장기적 안목으로 기술 혁신에 투자했고, 거래에서의 신뢰와 약속을 기업 경영의 핵심 가치로 삼았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파고는 이 질서를 흔들었다.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물결이 독일 기업의 전통적 경영 철학을 잠식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하던 수많은 중견 기업들이 해외 사모펀드나 중국 자본에 매각되었다. 신뢰와 공동체를 기반으로 쌓아온 ‘라인 자본주의’의 뿌리가 흔들리자, 독일 경제의 지속 성장 토대도 함께 약화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한국 기업들 역시 소유와 경영의 미분리, 대주주 중심의 불투명한 지배 구조, 그리고 단기 성과 집착이라는 문제를 여전히 안고 있다. 인맥이 실력을 대신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보다 상속을 위해 주가를 억누르는 관행이 반복된다. 이로 인해 재무 건전성은 훼손되고, 소액주주와 노동자의 권익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 결과가 바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이름의 구조적 저평가다.
지금 한국 경제는 저성장 고착화와 혁신 동력 고갈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낡은 시스템과 경직된 조직문화, 그리고 비탄력적 노동시장은 새로운 도약의 발목을 잡고 있다. 독일 기업의 경험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명확하다.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 그 사회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과거 독일 기업가들이 보여준 ‘장인정신’을 현대적으로 되살려야 한다. 첫째, 기업은 책임과 투명성을 경영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통해 이해관계자 모두에게 책임을 지는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 이사회와 소액주주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것이야말로 ‘메이드 인 코리아’의 새로운 신뢰 자본이 될 것이다.
둘째,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 기초 과학과 미래 핵심 기술에 대한 지속적 투자는 기업 경쟁력의 근본이다. ‘기술이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믿음은 과거 독일 기업가들이 보여준 확신이자 오늘의 한국이 되새겨야 할 신념이다.
셋째, 인재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독일 기업들이 직원과 가족의 삶을 함께 책임지며 평생기술교육을 약속했던 정신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안정된 노동시장과 청년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져야 한다. 숙련된 인재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포용적 기업 문화야말로 지속적인 혁신의 토대다.
리히터의 책은 묻는다. 우리는 글로벌 자본의 압력에 순응하며 단기 이익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공동체와 신뢰라는 근본 가치를 지켜 새로운 길을 열 것인가. 지금 우리의 선택이 한국 경제의 다음 세기를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