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후]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박일경 사회경제부 차장

▲ 박일경 사회경제부 차장
#. 독립적인 사법기관 구성원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는 경우 독재자는 ‘대법원 재구성(Court Packing)’을 통해 우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헝가리 오르반 빅토르 정권은 헌법재판소 규모를 기존 8명에서 15명으로 늘렸다. 여당인 피데스당 단독으로 새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으며 친정부 판사로 새로운 자리를 메웠다.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른 미국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내용 중 일부다.

요새 우리나라에선 국정감사가 한창이다. 며칠 전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사법 개혁안을 두고 국감장에 나온 전국 법원장들은 우려하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논쟁이 뜨거운 만큼 기시감 드는 얘기들을 재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세계사적 평가가 지나간 해외 사건과 ‘데자뷔’ 되는 현실은 씁쓸하다.

#. 1999년 우고 차베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사법부를 포함해 국가 모든 기관을 해산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했다. 위협을 느낀 대법원은 결국 차베스 요청을 받아들여 이러한 시도를 합법으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해산됐고 새 대법원이 들어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게 사법부를 통제할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인지, 2004년 차베스 정권은 대법관을 20명에서 32명으로 확대해 측근들로 채워 넣었다. 효과가 있었다. 이후 9년 동안 대법원은 정부에 반대하는 판결을 하나도 내놓지 않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가운데 인용한 또 다른 구절이다. 정치학자로서 저자들은 “이들 사례에서 독재자는 민주주의 게임의 심판을 매수했다”며 “헌법적 도전에 대한 방패, 그리고 정적을 공격하는 강력하면서도 ‘합법적인’ 창을 차지했다”라고 썼다.

검찰 개혁부터 사법 개혁까지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데 한 때 뜨거웠던 개헌 논의는 실종된 상태다. 최근 만난 국내 헌법 전문가는 “집권 세력에 유리한 현행 헌법을 고쳐 자기들 손으로 힘을 빼겠느냐”고 반문했다.

삼권 분립 핵심은 행정‧입법‧사법 간 ‘견제와 균형’이다. 견제와 균형은 마치 저울의 양 팔처럼 서로 정반대 방향에 위치해 무게 중심을 맞추는 작업이다. 대한민국 번영과 발전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하지만 종착역에 도착하는 길이 하나뿐인 건 아니다. 그 여정까지 예외 없이 한 목소리로 일사분란 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건전한 갈등과 긴장 관계를 국론 분열과 혼동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을 끌어안는 포용이 필요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에 붙은 부제는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다.

각자가 지지율 20%대를 흔들림 없이 받쳐주는 소위 콘크리트 지지층에 갇혀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헤아리는 자세가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집값, 금값, 은값, 주식, 코인 등 월급만 빼고 죄다 오른다는 세상이다. 인플레이션이 덮친 민생 경제에 사법 개혁이나 검찰 개혁은 해법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 싸움에 매몰돼 있을 때가 아니다.

▲ 대한민국 법원 로고. (사진 제공 = 대법원)

ek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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