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DX재단 이사장
대학·병원 원격 운영…‘공존’ 실천
실증모델 수출 ‘제2 새마을운동’化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228개 기초지방자치단체 중 절반 이상이 소멸 위험지역이다. 도시 또한 안정적이지 않다. 수도권 청년실업률은 9%를 넘었고, 많은 사람이 하루 12시간 일해도 불안하다.
수십 년간 정부는 일자리 창출에 매달렸지만, 소폭 증가에 그쳤다. 국제노동기구(ILO)는 2030년까지 전 세계 일자리의 14%가 인공지능(AI)과 자동화로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소득(UBI) 지급 논의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것은 기존 경제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보완책이다. 이제 보다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시 말해 돈을 벌어 생존하는 구조에서, 돈과 무관하게 생존이 보장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초생활을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아실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제안한다. 바로 ‘살림마을’이다.
살림마을은 단순한 귀농이 아니다. 먹거리, 에너지, 주거, 돌봄 같은 기본생활을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면, 개인은 생존 불안에서 벗어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현금을 주는 대신 공동체가 생존 기반을 함께 만드는 생존의 기본단위를 재설계하자는 것이다.
살림마을은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생존 자급(Zero Basic)은 신재생에너지와 스마트팜으로 에너지와 먹거리를 자급하고, 공동 주거와 품앗이 돌봄으로 생활비를 획기적으로 낮춘다. 도시 기능(Urban Basic)은 5G 통신으로 원격 의료와 온라인 교육에 접근하고, 언제든 대도시 문화를 향유한다.
가치 창조(Culture Basic)는 생존 안정 속에서 협력과 순환, 공존의 문화를 실천하며 새로운 가치와 혁신을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살림마을은 대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도 가능하다. 옥상에 텃밭을 만든다.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로컬푸드를 공동 구매하고, 육아와 노인 돌봄을 품앗이로 나눈다. 기초 생활비를 줄이고, 공동체를 통해 안정감을 되찾고, 나머지 시간은 자아실현에 투자한다. 기존의 문명을 누리면서 생존 불안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지방 살림마을은 더 많은 자급이 가능하지만 고립되지 않는다. 원격으로 세계 최고 대학 강의를 듣고, 원격 의료로 대학병원의 진료를 받으며, 주말엔 도시에서 공연을 본다. 생존은 마을에서, 문화는 도시에서. 1980년대 PC가 메인프레임을 없앤 게 아니라 협력하며 인류가 요구하는 컴퓨팅 파워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듯이, 살림마을과 대도시가 협력하며 인류 전체의 회복력을 높일 수 있다.
살림마을에는 공동체가 함께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한 레스토랑이나 공방, 예술인마을, 스포츠마을, 기업마을 등 특화된 앵커 비즈니스가 가능하다.
기본생활이 안정된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사업이라는 점이 기존 창업과 다르다. 개인이 독립적으로 창작이나 연구를 할 수도 있다. 생존 걱정 없이 온전히 자신의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다.
살림마을 모델은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등 글로벌 사우스 국가에서 더욱 절실하다. 이들은 기후협약 때문에 전통적 산업화 경로가 막혔고, 거대한 인프라를 건설할 자본도 없다. 이들에게 새로운 방법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어떨까. 일단 최소한의 투자로 신재생에너지, 물관리, 자원순환, 통신망 정도만 설치되어도 그들을 인류문명으로 초대할 수 있다.
전기와 컴퓨터가 있으면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한국이 살림마을을 실증하고 체계화하면, 이것은 글로벌 사우스에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 패키지가 된다. 제2의 새마을운동이 되는 것이다. 살림마을은 PC가 진화했던 것처럼 지속적으로 새로운 버전의 마을이 탄생할 것이고,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살림마을은 먼 미래의 유토피아가 아니다. 완주군의 로컬푸드, 전주의 에너지 전환, 서울 성미산마을의 공동육아 실험은 이미 살림경제의 싹이다. 이것들을 통합 모델로 체계화해야 한다.
혁신적 지자체, 실험적 대학, 도시 아파트 단지에서 파일럿을 시작하자. 성공 사례가 나오면 청년들이 스스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살림마을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 기후위기, 지역 소멸, 도시 불안을 동시에 해결하는 미래 전략산업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