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드라마일뿐?…‘백번의 추억’ㆍ‘태풍상사’ 고증 논란 [해시태그]

배경과 출연진 고증에 쏟아진 반응


(디자인=김다애 디자이너 mnbgn@)


삐삐가 울리고 버스 차창 너머로 회수권이 오갑니다. 2025년 가을 방송가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중인데요. 1980년대의 버스와 1990년대의 사무실, 주말 드라마 tvN ‘태풍상사’와 JTBC ‘백번의 추억’은 잊힌 풍경들을 되살려내며 시청자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죠.

당연한 듯 사람들의 허리춤에 채워진 삐삐 호출음과 버스 안내원에게 건네는 회수권의 질감, 회사 텔렉스가 찍어내는 소리는 그 자체로 과거의 온기를 전하는데요. 고증이 놀랍다는 반응이 이어졌고 잠시나마 시간여행의 문이 열린 듯했죠. 하지만 오래지 않아 화면 밖 시선은 달라졌는데요. 그 시대를 재현하려는 정성만큼,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더 까다로워졌습니다.


(출처=tvN '태풍상사' 캡처)


‘태풍상사’는 1997년 외환위기 전후의 공기와 ‘오렌지족’이라는 상징적 풍경을, ‘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 버스 안내원(안내양)의 일상과 첫사랑을 호출하죠. 두 작품 모두 그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의 향수를 자극했는데요. 첫 방송 시청률과 화제성은 이 흐름을 확인해 주죠. 두 작품 모두 각각 7.5%, 6.8%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선두에 섰는데요.

두 작품의 공통된 강점은 ‘시대의 질감을 살린 재현력’입니다. ‘태풍상사’의 이나정 감독은 “1997년 당시를 진정성 있게 고증하는 것이 이 드라마의 정체성”이라고 강조했는데요.

제작진은 실제 90년대 직장인들을 인터뷰하고 당시 상사에서 쓰이던 소품을 찾기 위해 박물관까지 발품을 팔았죠. 을지로의 간판, 빽빽한 서류철, 삐삐와 팩스, 텔렉스 같은 사무기기가 만들어내는 풍경 속에 IMF 직전의 활기와 불안이 자연스럽게 녹아듭니다.


(출처=JTBC '백번의 추억' 캡처)


‘백번의 추억’은 화려한 압구정이 아니라 서울 시내버스 ‘100번’이라는 생활 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요. 버스 안내양 고영례(김다미 분)와 서종희(신예은 분)의 우정과 사랑을 중심으로 출퇴근길의 인파, 차창 밖 간판, 흔들리는 손잡이 같은 세부 묘사를 통해 ‘움직이는 1980년대’를 그려냈습니다. 제작진은 실제로 당시 운행하던 버스를 복원해 촬영에 사용했을 정도로 사실적인 현장을 재현했죠.

두 드라마 모두 직업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리얼리티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태풍상사’에서는 보고와 결재, 출장, 회식 등 상사맨들의 업무 루틴과 전화 예절, 명함 문화가 현실감 있게 표현되고요. ‘백번의 추억’은 안내양의 “오라이” 구호와 개찰 동작을 반복하며 하루의 리듬을 복원했죠. 손으로 돈을 받고 회수권을 찢던 그 시절의 노동이, 도시의 소음 속에서 하나의 생활 리듬처럼 살아납니다.

이같은 호평에도 불구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장면들이 등장했는데요. 그 시절을 그리는 이들도, 이를 상상하던 이들도 “이게 맞나”하는 의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어색함은 흐름을 방해했죠.


(출처=tvN '태풍상사' 캡처)


앞서 설명한 대로 ‘태풍상사’는 1997년 IMF 사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런데 세부 장면을 들여다보면 1997년이라기엔 한 발 더 앞서간 복고를 보여주고 있죠. 주인공 강태풍(이준호 분)은 부유한 무역회사 사장의 아들로, 당시 ‘오렌지족’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인데요. 트렌디한 브릿지 헤어와 화려한 의상, 과장된 욕 제스처까지 90년대 후반 젊은이의 분위기를 재현했지만 연락 수단으로 사용한 삐삐(호출기)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미 삼성전자의 PCS폰 ‘SCH-1100’ 등 휴대전화 보급이 시작된 시기였는데요. 물론 지금처럼 대중화된 단계는 아니었지만, 여유 있는 ‘오렌지족’이라면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삐삐 설정은 너무 의외였죠.


(출처=tvN '태풍상사' 캡처)

(출처=tvN '태풍상사' 캡처)


회사 내부의 풍경도 비슷합니다. 태풍상사 경리인 오미선(김민하 분)이 사용하는 업무 도구는 펜과 자, 주판인데요. 아무리 돈이 풍족하지 않은 중소기업이라지만(드라마 상에서 대기업은 엑셀을 쓴다고 언급) 계산기 대신 주판, 컴퓨터 엑셀 대신 종이에 줄을 그어 회계 정리를 하는 모습은 어색하다는 말로도 부족했죠. 거기다 사무실 전화기 또한 버튼식이 아닌 다이얼식이었는데요. 혹시 80년대로 잘못 설정이 된 건 아닌지 헷갈리게 했습니다.

이 밖에도 간호사의 흰 모자 착용 시기, 여성들의 화장법, ‘태풍상사’를 취재하는 기자의 과장된 서울말을 넘어선 북한말 억양 등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는데요. 시청자들은 “고증을 위한 노력은 높이 사지만 많이 봐줘도 90년대 초반 모습이다”, “시대 배경은 아무리 봐도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인데 계속 97년이라 우긴다”, “그 시절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좀 불쾌하다”라는 반응을 내놨습니다.


(출처=tvN '백번의 추억')


그래도 ‘태풍상사’는 ‘백번의 추억’에 비하면 양반이라는 평가를 받는데요. 1980년대 버스 안내양의 향수를 가득 담은 이 드라마는 ‘7년 뒤’라는 자막과 함께 1989년도로 시간을 옮기는 순간 길을 잃었다는 지적을 받았죠. 마치 2000년대로 향한 것 같았는데요.

버스 안내양에서 미용실 스태프로 전직한 고영례는 이후 디자이너로 성장합니다. 그런데 고영례를 찾는 신종희에게 미용실 동료가 ‘영례쌤’이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쌤’이라는 호칭은 ‘선생님’을 줄인 말로, 1990년대 후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미용실이라지만)1980년대 후반 직장문화에서 동료 간에 ‘쌤’이라 부르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시대 배경과 대사 톤이 완전히 어긋났죠.


(TV조선 ‘솔깃한 연예토크 호박씨’ 캡처)

(출처=JTBC '백번의 추억' 캡처)


등장인물의 옷차림과 헤어스타일, 화장법 역시 1989년이 아닌 2000년 아니 2025년 현재라고 봐도 무방했는데요. 특히 18일 방송될 11회 예고편에서는 고영례와 서종희가 ‘1989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는 장면이 공개됐는데 당시 실제 대회 수상자였던 오현경·고현정의 대표 이미지인 ‘사자머리’ 헤어스타일은 찾아볼 수 없었죠. 볼륨이 하나도 없는 생머리와 포니테일로 등장해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고증은 이제 내다 버렸다” “1989년이 아니라 2025년 같다”는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드라마 팬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어느 정도 ‘흐린 눈’은 필요하다”며 옹호에 나섰는데요. 이 옹호 또한 고증이 부족하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죠. ‘고증은 부족하지만 시대극은 하고 싶어’라는 비판이 결코 가볍게 들리지 않는 이유인데요.

“‘백번의 추억’은 80년대라 하기엔 너무 세련됐고 ‘태풍상사’는 90년대라 하기엔 너무 촌스럽다”

이 한 줄의 댓글에 쏟아진 시청자들의 공감은 그만큼 컸죠. 흠이 없는 완벽함을 바란 건 아니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못내 아쉬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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