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_황근의 시선] 편성의 소멸 … 방송의 종말을 예고하나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대중사회 이끌어온 TV ‘편성의 띠’
온라인매체 맞춤형 프로에 맥못춰
OTT 의존…전통매체 사활 기로에

영국의 문화평론가이자 미디어 학자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그의 저서 ‘텔레비전, 기술과 문화적 형태’라는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텔레비전이고, 그 원동력은 편성에서 나온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텔레비전은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계획된 흐름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삶의 방식(way of life)’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지난 한 세기 대중사회를 이끌어왔던 텔레비전의 위력은 특정 시간대에 약속된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편성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소수 방송사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예고된 시간에 독점적 메시지를 제공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방송 편성은 특정 시간대에 대한 시청자들의 충성심(loyalty)을 형성하는 매우 효과적인 기술이었다.

이러한 방송 편성은 방송사의 재정적 기반이기도 하다. 광고주에게 방송광고의 경제적 가치는 자신들의 상품을 구매할 가능성이 있는 ‘목표 시청자(target audience)’를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특정 시간대에 특정 장르의 프로그램이 고정 편성된다는 것은 매우 강력한 마케팅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수 지상파방송 독점구조에서는 그 위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오랜 지상파방송 독점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사람들 뇌리에는 저녁 8시 일일드라마, 9시 종합뉴스, 10시 미니시리즈라는 일종의 ‘편성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막대한 광고 수익을 기반으로 큰 호황을 누렸던 이유이기도 하다. 1991년 출범 초기 SBS가 8시에 저녁 종합 뉴스를 편성하는 대체 전략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2000년대 들어 케이블TV가 양적으로 급성장했지만, 방송채널사업자들은 크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특정 유형의 프로그램이 특정 요일과 시간대에 지속적으로 제공된다”는 편성 띠를 형성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인기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을 제작·방송했던 tvN, jtbc 같은 유료 방송 채널들이 막대한 제작비에도 불구하고 광고 수입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평균 시청률 3% 수준의 지상파방송과 비교해 1% 중반의 이들 채널의 경쟁력은 크게 낮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광고단가가 차이나는 것은 편성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예측가능한 시청자 수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견고한 편성 띠로 안정적 수입을 누려왔던 지상파방송 역시 온라인 매체의 공세에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 보인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이용해 개별 시청자에게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지능형 편성’에 전통적인 ‘시간적 편성’이 맥을 못추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연 3조 원대였던 지상파방송 광고 매출이 1조 원 아래로 추락했다. 올해 KBS 광고 수입이 2000억 원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얼마 전 작년 말에 MBC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의 인기 드라마를 편성해 광고 수익 증가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AI 분석보고서가 나왔다. 몇 개의 사례들을 대상으로 분석한 것이고 그 결과도 일관되지 않지만, OTT 콘텐츠를 통해 긍정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보여준 것 같다. 이제 전통 매체들은 막대한 제작비 상승으로 인해 OTT와 협업하거나 구매한 콘텐츠를 편성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OTT가 제작한 콘텐츠를 구입해 부정기적으로 편성해 버텨야만 한다면, 특정 시간대를 특정 프로그램 장르와 연계해 고정된 시청자를 확보하는 전통적인 방송 편성 개념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인기있는 OTT 콘텐츠에 의존해 더부살이하듯 생존해야 한다면, 전통적인 방송매체가 소멸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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