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의 정치원론] 인물 비평에 과몰입하는 입법자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보편·평등성 중시하는 자세 필요
특정인물 촌평 몰두, 감정만 악화
지켜야 할 규범 없고 명성도 상실

법은 보편성, 평등성을 띤다. 국가공동체의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한 법을 만들기 위해선 입법자들도 보편성, 평등성을 중시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사회현상에 대한 넓은 일반화를 정립하고 그걸 법의 형태로 만드는 데 전념해야 한다. 개별 개체나 사례의 지엽적 이해, 특별한 고려, 예외적 적용은 입법 후 법의 집행·해석 단계에서 행정부나 사법부가 할 일이다. 입법자가 우선순위를 둘 일이 아니다. 그런 만큼 입법자들은 특정 인물들을 겨냥하는 발언도 가능한 한 삼가는 게 좋다. 개별 인물을 지칭하는 구체적 고유명사보단 일반 현상에 관한 추상적 보통명사가 입법자들의 언어에서 주를 이뤄야 한다.

근래 상황은 이와 같지 않다. 국회의원과 정치권 인사 등 입법을 맡은 사람들의 입은 특정 인물들에 대한 촌평으로 가득하다. 칭찬보단 비판이 압도적이다. 여야 의원이 서로에게, 같은 당이지만 계파가 다른 정치인끼리, 의원이 행정부 공직자나 심지어 일반인에 대해 구체적 실명을 말하며 거의 욕에 가까운 험담·독설을 쏟아낸다. 비속어가 튀어나올 때도 있다. 사석은 물론 공식 회의에서 그렇다는 데 사안의 심각함이 크다. 필부도 남을 실명으로 깎아내리는 걸 꺼리는 일상의 규범이 있는데, 정작 일반성을 띤 입법을 공식적으로 해야 할 사람들에겐 그런 규범이 없는 듯하다.

입법자들이 인물 비평에 과몰입하는 덴 여러 이유가 있다. 수긍할 만한 것도 있다. 작년 연말 이래 계엄, 탄핵, 조기 대선, 내각 인선, 여야 당대표 선출 등 엄중한 국면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레 전현직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 여야 정치인들이 화두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로, 국회의 입법 기능이 줄고 비입법 기능이 커진 장기 추세를 들 수 있다. 행정부가 위임입법을 통해 실질적 입법권을 행사하는 현상은 권위주의 시대가 아닌 오늘날에도 정도 차는 있으나 계속되고 있다. 입법권의 상당 부분을 행정부에 넘긴 국회의원들은 대신 행정부 감시·감독, 지역구 민원, 사회 담론·공론 조성 등 비입법 기능으로 활동을 넓혔다. 그 결과, 일반론의 입법에 비해 구체적 정책이나 쟁점에 관련된 특정 인물들을 겨냥해 언급하는 일이 부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말 우려를 자아내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주지하듯이 정치권의 양극화가 심해지며 흑백논리의 전면전이 격화되고 있다. 명색이 입법자인 사람들이 이 선악 대결의 최전선에서 투사 노릇을 하다 보니 상대편 인사들을 실명으로 비난하며 사회에 적대감을 퍼뜨리게 된 것이다. 추가로, 추상적 입법 논의보다 구체적 인물 비난이 언론의 주목과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 좋아 인지도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선호하게 된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이처럼 과몰입하게 되는 이유만 봐도 정치인들의 인물 비평은 바람직하지 않은데, 초래되는 폐해를 보면 우려가 더 커진다. 무엇보다 입법의 일반성·보편성에 흠이 난다. 법은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유불리를 가져와선 안 되고 모두를 평등하게 보며 일반화 논리를 보편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특정 계층에 대한 배려나 특수 맥락의 고려는 가급적 행정·사법 단계로 넘기고 입법에선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야 형평성도 기할 수 있다. 이 입법을 특정 인물들에 대한 비난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주도할 때 편견과 편향성이 판치게 된다. 또한, 인물 비평은 정서적 감정싸움과 동어반복일 만큼 서로를 더 악화시킨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입법의 일반성과 입법과정의 예의를 중시했던 미국 의회에선 의원끼리 비난·모욕적 언사를 주고받는 것, 심지어 실명으로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규범이 있었다. 그 규범이 약해진 오늘의 미국 의회는 옛 명성을 잃었다. 우리나라 입법자들은 그보다도 훨씬 좋지 않은 상태다. 이제 잃을 명성마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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