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편집했던 패션계의 교황 안나 윈투어

2025년 6월 그녀가 미국 패션잡지 보그(Vogue)를 떠납니다. 금발 단발머리와 블랙 선글라스로 단박에 떠올려지는 그녀. 안나 윈투어(Anna Wintour)가 말이죠.
1988년부터 37년간 미국 보그를 이끌어온 윈투어는 단순한 편집장이 아닌 하나의 문화적 기호 그 자체였는데요. 39세 최연소의 나이로 자신의 꿈이었던 미국 보그 편집장에 올랐죠. 그녀는 보그를 단순한 패션 매거진을 넘어 정치, 문화, 사회 이슈를 다루는 글로벌 문화 매체로 변모시켰습니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그 편집장, 멧 갈라(Met Gala)의 호스트 다들 저마다의 기억으로 떠올리는 윈투어는 시작부터 파격 그 자체였죠.

1988년 11월 미국 보그 표지는 크리스찬 라크르와의 화려한 오트쿠튀르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모델이 차지했습니다. 전통과 격식을 중시하던 패션지 관행에 반기를 든 이 커버는 당시 편집부조차 긴장시켰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는데요. 당시 수천 달러에 달하는 고급 오트쿠튀르 라크르와 재킷과 청바지의 조화. 내부에서도 ‘재난 수준’이라는 혹평이 뒤따랐죠. 그 커버 한 장으로 패션은 상류층의 전유물에서 거리의 개성으로 내려왔는데요. 패션이 엘리트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예술로 이동하던 그 순간을 탄생시킨 결정. 윈투어는 처음부터 과감하게 방향타를 꺾었습니다.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와 동명의 영화. 물론 허구지만, 완전히 낯선 이야기는 아닌데요. 이 소설의 저자 로렌 와이스버거는 실제로 1999년 보그에서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로 일했죠. 영화 속 패션잡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는 단순한 창작물이 아니라 윈투어의 카리스마, 통제력, 그리고 거리감을 반영한 인물이었는데요.
영화 속 편집장 ‘미란다 프레슬리’의 모티브가 됐다는 여러 보도에도 그녀는 공식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시사회에는 프라다를 입고 등장해 모두 웃음을 짓게 했는데요. 함께한 딸 비 샤퍼는 “엄마랑 너무 닮았어”라는 감상평을 내놨지만, 윈투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죠.
2010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셉템버 이슈(The September Issue)’ 속 윈투어는 단호하게 “No”를 외치는 프레슬리 그 자체였는데요. 사진 디렉터 그레이스 코딩턴과의 신경전은 특히 유명했습니다. 사진팀이 수십 장의 커버 후보를 보여줘도, 그녀는 고개만 흔들다 마지막에 딱 하나를 가리키죠. 그러면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요. 윈투어의 “Yes”는 수많은 “No” 위에 올라선 결과입니다.
그 순간을 보그 관계자는 “그녀가 ‘Yes’라고 말하면, 전율이 일어요”라고 표현했는데요. 이는 단지 윈투어의 고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만큼 많은 가능성을 검토하고 하나의 정확한 방향으로 좁혀가는 그녀의 방식을 보여주죠.

1992년 한 젊은 디자이너가 런던에서 이름 없이 쇼를 올리자, 윈투어는 그를 뉴욕으로 불러들였는데요. 망설임 없이 그의 작품을 보그 커버에 실었습니다. 그 디자이너는 바로 알렉산더 맥퀸. 윈투어는 ‘하이패션의 반항아’로 불리는 맥퀸을 글로벌 패션 권력의 중심 무대로 끌어줬죠. 단지 옷을 보는 눈이 아니라 시대의 감각을 읽는 레이더와 같았는데요. 마크 제이콥스, 톰 포드, 프로엔자 슐러까지… 윈투어의 선택을 받은 디자이너는 패션의 중심으로 도약했습니다.
윈투어의 메시지는 비단 패션에 국한되지 않았는데요.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에 커버 모델로 나섰고, 힐러리 클린턴 역시 대선 출마 전부터 윈투어의 선택을 받았죠. 패션이라는 렌즈를 쥔 ‘정치 분석가’. 윈투어는 항상 시대의 메시지를 먼저 읽고 한발 앞서 제안했습니다.
이처럼 보그의 커버는 그 자체로 브랜드였는데요. 누가 표지에 서느냐에 따라 한 디자이너의 커리어가 바뀌고 한 스타의 이미지가 재편되곤 했죠. 윈투어는 이 막강한 무기를 정밀하게 다뤘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킴 카다시안과 카니예 웨스트 부부의 웨딩 커버였습니다. ‘리얼리티 스타’였던 킴은 그 당시만 해도 ‘하이패션’의 세계에서 배제되던 인물이었는데요. 하지만 윈투어는 보그 커버라는 가장 보수적인 무대 위에 이 커플을 세웠습니다. 보그가 타블로이드지로 전락해 버렸다는 격한 비난이 쏟아졌지만, 윈투어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며 거리낌이 없었죠.

윈투어가 키운 또 하나의 무대는 바로 멧 갈라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연례 자선행사였던 이 파티는 1995년 윈투어 손에 들어간 뒤 ‘지구상 가장 권위 있는 패션 이벤트’로 바뀌었는데요. 단순 ‘자선 갈라’를 뛰어넘어 코스튬 갈라, 패션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묘사되고 있죠. 특히 2018년 ‘천상의 몸: 패션과 가톨릭적 상상력(Heavenly Bodies: Fashion and the Catholic Imagination)’ 테마 무대에서 리한나는 교황 모자를 쓴 파격적인 룩으로 등장해 큰 화제가 됐습니다. 세계 언론은 이 장면을 두고 ‘종교와 욕망, 패션의 교차점’이라 평가했는데요. 물론 이 기획과 테마 모두 윈투어의 승인으로 진행됐습니다.
이런 윈투어가 미국 보그 편집장에서 물러난다는 발표가 나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또 프리슬리였는데요. 이보다 앞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 영화 제작 발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노쇠한 미란다가 디지털 시대를 맞아 고전하는 설정으로 알려졌는데요. 정확히 이 시점에서 보그의 ‘전통적 편집장’이라는 이름을 내려놓는 윈투어라니…참 공교롭습니다.

말을 아꼈던 윈투어.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모든 행동이 메시지였는데요. 커버 모델 선정, 멧 갈라의 주제, 공식 석상 속 의상 모두가 하나의 언어였고, 윈투어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옷이 아닌 시대를 편집했던 윈투어, 37년간의 커버가 이를 증명하고 있죠.
하지만 ‘완전한 물러남’은 아닌데요. 윈투어는 여전히 콘데나스트의 글로벌 콘텐츠 총괄 책임자이며, 멧 갈라 총감독이자, 전 세계 보그의 방향을 설정하는 인물입니다. 전통적 무대에서 한 발짝 물러났을 뿐, 그 영향력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