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44. EU, 내년 돈세탁방지청 출범

입력 2024-04-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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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군사학과 교수·국제정치학

국경없는 단일시장…검은돈 ‘활개’
‘차단·응징’ 돈세탁방지 대오 갖춰

2018년 2월 초 미국 재무부는 라트비아의 3대 시중은행 ABLV가 돈세탁에 연루됐다고 발표했다. 미 행정부는 이 은행이 러시아와 연계해 유령회사를 통해 수년간 21억 유로, 약 3조450억 원의 돈세탁을 자행해왔다고 밝혔다. ABLV는 그해 6월에 청산됐고 은행장을 비롯해 유령회사의 임원도 기소됐다.

유럽에서 돈세탁이 적발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해 11월 덴마크 최대 민간은행 단스케(Danske)은행의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지점도 같은 혐의에 연루됐다. 이 은행은 2007년부터 8년간 러시아와 라트비아, 키프로스와 영국 등 비거주자의 달러 예금을 받아 일부를 유령회사를 이용해 세탁 후 수백 개 계좌에 송금했음이 밝혀졌다. 이런 대형 금융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자 뒤늦게나마 유럽연합(EU)이 돈세탁 방지를 위해 칼을 빼들었다.

한해 돈세탁 그리스 GDP 웃돌아

지난 2월 22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EU 27개 회원국 대사들은 내년부터 업무를 개시할 EU 돈세탁방지청 소재지 투표를 실시했다. 1차 투표에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시가 과반을 얻어 마드리드, 파리를 제치고 이 기구를 유치했다. 단일화폐 유로존의 중앙은행인 유럽중앙은행(ECB)이 여기에 있어 금융 인프라가 발달했다는 점이 신설 청의 유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EU 27개 회원국 간에는 상품과 서비스뿐만 아니라 자본과 사람도 자유롭게 이동한다. 라트비아 ABLV 사건에서도 한 회원국의 금융기관이 여러 회원국 거주자의 예금을 받아 처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국경없는 단일시장 EU이기에 회원국 전체를 대상으로 금융기관의 돈세탁을 감시할 기구가 필요하다. ECB 내에 금융기관의 감독과 해산을 담당하는 단일 감독청이 있지만 돈세탁까지 맡을 여력이 없었다.

돈세탁방지청은 EU 회원국 내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돈세탁 혐의를 조사할 수 있다. 적발된 금융기관의 경우 최대 1000만 유로, 145억 원의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 ABLV 은행의 경우 미 재무부가 돈세탁 혐의 조사를 발표한 후 고객들이 예금 수신고의 22%를 인출해갔다. 라트비아 정부나 ECB 지원도 소용이 없어 결국 이 은행이 부도처리됐다. 그만큼 은행이 돈세탁에 연루될 경우 경영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돈세탁방지청에서는 내년부터 400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한다. 점점 지능화하는 조직 범죄단체들이 자주 이용하는 돈세탁을 적발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EU 경찰기구인 유로폴(Europol)은 EU 내 돈세탁 규모를 EU GDP의 1.3%, 약 2천 500억 달러 정도로 추산했다. 해마다 그리스의 국내총생산보다 300억 달러가 많은 돈이 세탁되는 것이다. 27개 회원국별로 돈세탁 감시 규정과 기구가 있어 업무가 분절화했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가 3년 전에 돈세탁방치청 설립과 관련 법안을 제안했는데 이제야 성사됐다. 아울러 EU 예산의 부정 지출도 EU가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있다. 부정 사용된 돈이 아무래도 세탁을 거치는 게 많기 때문이다.

ERF, 부정지출 대규모 적발

지난 3일 이탈리아 경찰은 6억 유로, 약 8700억 원 정도의 경제회생기금(European Recovery Fund·ERF) 부정 지출을 적발했다. EU는 2021년 코로나19가 야기한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8000억 유로, 약 1160조 원의 ERF를 조성했다. 이탈리아는 이 기금의 최대 수혜국으로 약 2000억 유로의 지원을 받았다. 이 기금은 기후위기 대응과 디지털 전환 등 EU 회원국 정부가 제출한 계획에 따라 집행돼야 한다.

EU 예산의 부정지출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유럽검찰청(European Public Prosecutor’s Office·EPPO)은 200여 건의 제보를 받아 수사를 펼쳐 왔다. 이탈리아 경찰은 EPPO의 지휘를 받아 이날 22명을 체포했다. 이 수사에서 이탈리아 경찰은 아파트와 빌라, 람보르기니, 포르셰 등 고급 자동차를 증거로 압수했다. 3일 수사는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서도 이뤄졌다. 조직범죄 집단이 이들 나라에서 서로 연관됐다. 이들은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에 유령회사,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했다. 범죄집단은 유령회사가 기후위기 등에 대응하는 것처럼 거짓 서류를 꾸며 ERF를 신청해 자금을 따냈다. EPPO의 수사에서 보듯이 단일시장 EU를 조직 범죄 집단이 십분 활용해 왔다.

이런 사실은 지난 5일 유로폴이 발표한 EU 내 조직범죄 집단의 분석 보고서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유로폴 본부. 유로폴은 지난 5일 유럽연합 내에 조직원 2만5000명을 거느린 821개의 갱단이 활동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AP연합뉴스
유로폴, “범죄집단 70%가 돈세탁”

2000년 유엔은 초국적 조직범죄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이에 따르면 조직범죄는 3인 이상의 사람들이 일정 기간동안 힘을 합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유로폴은 이 정의에 따라 처음으로 조폭의 현황 보고서를 펴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EU 27개 회원국 내, 조직원 2만5000여 명을 거느린 821개 갱단의 70%가 돈세탁을 한다. 조폭 집단의 75%가 EU 내 2개에서 7개 회원국에서 활동할 정도로 이들은 다국적 조직범죄 집단이다.

이처럼 범죄 집단은 ‘나는 놈’이었는데 대응하는 EU 기구는 이제껏 ‘뛰는 놈’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이들의 민첩성과 EU 안에서 국경 없이 활동함을 특징으로 들었다. 이들은 마약 거래부터 불법 이민자 송출, 그리고 부동산과 건설업 진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검은돈을 찾아 기민하게 움직인다.

EU 회원국 간의 경찰협력기구 유로폴, EU 예산의 부정 지출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유럽검찰청, 그리고 여기에 돈세탁방지청도 내년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EU 내 검은돈을 사전에 차단하고, 사후에 수사와 기소하는 기구의 틀이 갖춰졌다. 중요한 것은 이 기구 간의 협력이 굳건해져 돈세탁 방지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내는 것이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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