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불량 승객'과의 전쟁…기자가 '전철 질서지킴이' 동행해 보니

입력 2019-09-20 18:00수정 2019-09-20 18:06

임산부 배려석, 노약자석 양보 안내에…욕설과 폭언 비일 비재

▲'임산부 배려석'은 질서지킴이게 뜨거운 감자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수많은 민원과 불만이 제기된다. (홍인석 기자 mystic@)

두 눈이 객실 곳곳으로 향한다. 불법 전단지, 쓰레기가 보이자 곧바로 손을 뻗는다. 시선은 또 다른 곳을 응시한다. 난동자나 불법 몰래카메라 촬영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객실 환경부터 치안 유지까지 담당하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질서지킴이’다.

19일 기자는 코레일 협력업체 소속 질서지킴이와 동행해 그들의 하루를 살폈다. 질서지킴이는 2인 1조로 함께 움직이며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또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근무한다.

이들은 코레일 협력업체 소속 직원으로 수도권에 근무하는 사람은 105명. 대부분 60대인 이들은 퇴직 공무원이나 철도 업무를 하다가 은퇴한 사람들이다.

이날 기자와 동행한 최명섭ㆍ조철윤 질서지킴이는 일과 중 상당수 시간을 ‘불량 승객'과의 마찰에 할애했다. 노약자석을 홀로 차지한 사람,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비임산부, 간이수레를 끌고 물건을 파는 이동 상인이 주요 관찰 대상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말,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을 이들이 전담한다. 욕설과 폭언을 듣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기자가 동행한 날도 고성이 날아들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남성에게 두 질서지킴이가 “현재 앉아 계신 곳은 임산부 배려석입니다. 임산부가 타면 자리 양보를 부탁드립니다”라고 안내하자 일이 터졌다.

남성은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나에게 자리를 옮기라 마라 하느냐. 법으로 정해진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라며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5분가량 고성이 오간 끝에 결국 그 남성은 임산부 배려석을 그대로 차지했다. 질서지킴이들은 거듭된 안내에도 폭언을 내뱉는 남성을 뒤로 한 채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계도만 할 수 있을 뿐, 승객의 행동을 강제로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이 참 어려워요. 단속해도 욕을 먹고, 안 해도 민원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사법권이 없어서 승객의 행동을 강제할 수 없거든요. 최대한 달래서 양보하는 행동을 유도할 수 밖에 없어요.” 최명섭 질서지킴이는 쓰게 웃었다.

동행 초반 2시간 동안 기자가 본 ‘불량’ 승객은 9명. 그러나 "오늘은 아주 적은 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보통 전철 곳곳에서 더 많은 불량 승객과 씨름을 벌인다는게 이들의 설명이다.

▲질서지킴이가 이동 상인에게 퇴거 조치를 내렸다. "이날은 큰 소란 없이 안내에 따라줘서 다행"이라고 귀띔했다. (홍인석 기자 mystic@)

이동 상인도 주요 단속 대상이다. 객실 내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 다른 승객에게 방해가 돼서다. 이날도 어김없이 이동 상인과 마주했다. 상인은 “단속을 피해서 이 전철을 탔는데 여기서 마주치네…”라며 말을 흐렸다. 질서지킴이들은 곧장 퇴거 조처를 내렸다.

최명섭 질서지킴이는 “퇴거 조치하더라도 이들이 다시 전철을 타는 것은 막을 수 없다”라며 “우리가 벌이는 단속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어 “가장 좋은 방법은 승객들이 물건을 사주지 않는 것이다. 이동 상인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강력한 제재를 취하기도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해야 할 일을 하고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직업. 그런데도 크고 작은 보람에서 일의 이유와 만족감을 찾고 있다.

최명섭 질서지킴이는 “응급환자를 조처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간질 증세를 보였는데, 응급처치한 뒤 구급대원에게 인수인계해 큰일을 피했다”라고 덧붙였다.

조철윤 질서지킴이는 “길을 묻는 노인에게 응대하다 보면 고맙다는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 그런 작은 일이 일을 계속하는 원동력이 아닐까”라고 답했다.

▲조철윤 질서지킴이가 전철 탑승 전 역사 내 시설물을 점검하고 있다. 시각 장애인 유도 블록을 걸으며 균열이 없는지 살피고 있다. (홍인석 기자 mystic@)

질서지킴이의 노동 강도는 만만치 않다. 전철에 타기 전 시설물을 점검하고, 하루에만 열댓 번 지하철을 오르내린다. 여러 돌발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업무 만족도는 높은 편이란다.

유석태 소장은 “건강상 이유가 아니라면 그만두는 사람이 아주 적다”라며 “올해도 전문자격증을 통해 취업한 1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계속 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지만, 전철 곳곳의 궂은일을 처리하고, 승객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들이다.

▲조철윤(왼쪽)ㆍ최명섭 질서지킴이는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떤 승객은 할아버지나 아버지 나이대라서 당부를 잘 따라주기도 한다"라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홍인석 기자 mystic@)

업무를 마칠 때쯤, 승객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냐고 물었다. 이들은 현재의 규정을 잘 지켜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만들어진 규정에 따라 질서 유지에 힘쓰는 처지에서 바라는 최선이기도 했다.

최명섭ㆍ조철윤 질서지킴이는 "큰 소리로 통화하거나 다리를 벌려 앉지 않는 것, 이동 상인에게 물건을 사지 않고, 노약자석과 임산부 배려석이 제 주인을 찾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며 "공중도덕을 잘 지킨다면 모두에게 쾌적한 전철이 되지 않겠냐"라고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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