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광고로 보는 경제] “밥통도 하나 못 만들어? 야이 밥통들아!”

입력 2019-06-10 16:55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절약시대의-알뜰한 살림장만!'

1970년대 즈음, 이 시절 잡지들엔 이런 광고들이 차고 넘친다.

이 글은 당시 대통령이 이것 때문에 “야이 밥통들아!”라고 실무 관료들에게 소리쳤다는 구슬픈 이야기가 구전돼 오는 어느 가전제품에 관한 이야기다.

▲수두룩한 '밥통' 광고들.

◇밥통과 밥솥

정말이지 이맘때쯤 이런 부류의 광고는 너무나도 많다. 근데 잘 보면 ‘밥솥’이 아니라 ‘밥통’의 광고다. 밥을 짓는 기구와 밥을 보관하는 기구가 이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밥통은 말 그대로 밥을 담는 기구다. 밥통 광고엔 그 어디에도 ‘밥을 짓는’ 기능에 대한 소개는 찾아볼 수 없고, ‘밥을 보온해 주는’ 기능에 대한 소개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광고 옆엔 꼭 같은 원리의 제품인 에어포트(일명 커피포트)의 광고도 빼놓지 않는다.

왤까? 이 시절엔 ‘전기압력밥솥’이 개발되지 않아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게 되면 마치 군대에서 먹는 ‘찐밥’처럼 윤기 없이 푸석푸석한 식감의 밥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밥을 하는 도구인 ‘밥솥’은 별도의 상품으로 존재했다. 당연히 이런 압력밥솥의 경우는 별도의 열원이 없기 때문에 가스불로 밥을 짓는 것이었다.

▲밥솥은 이 광고에서처럼 별도로 판매하는 제품이다. 당연히도 '밥통'은 절대로 '밥솥'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다지 설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압력밥솥은 밥을 맛있게 만들 수는 있어도 해놓은 밥을 따뜻하게 보존할 수가 없다. 열원이 가스기 때문에 가스불을 아주 약하게 계속 켜놓지(당연히 이러면 안 된다) 않고서야 따뜻한 보존이 불가능하다.

놔뒀다가 다시 가스불로 덥히면 불이 닿는 아랫부분은 타서 못 먹고, 오래된 찬밥은 상한다. 여러모로 ‘전기밥통’은 필요하고도 편리한 물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즘의 신혼부부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구매되곤 하는 ‘스타일러’에 비견할만한 상품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구슬픈 구전은 어디 갔냐고? 이제 시작이다.

◇“야이 밥통들아!”

때는 위의 광고들로부터 조금 지난 1980년대. 제5공화국 때의 일이다.

1980년 초부터 부유층을 선두로 차차 해외여행의 문호가 개방됐다. 지금도 마찬가지인 해외여행의 필수 요소는 해외에서 밖에 살 수 없는 특별한 상품을 사오는 것이다. 근데 이때,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말이지 특별한 상품이 있었으니.

일본에는 ‘밥도 맛있게 짓는 밥솥’‘보온까지 해주는 밥통의 역할’까지 겸하는, 그야말로 밥솥과 밥통의 신기원을 연 제품이 있었던 것. 바로 그 유명한 ‘코끼리표 밥솥’이다.

▲이것이 바로 센세이션했던 그 제품, 코끼리표 밥솥! 가운데 잘 보면 코끼리가 그려져 있다.

아래 이어지는 내용은 정말 익히,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코끼리표 밥솥의 압도적인 인기는 일본에 다녀오는 부녀자들이 왼손에 밥솥 하나, 오른손에 밥솥 하나, 나머지 하나는 발로 밀면서(발로 데굴데굴 굴려서 가져온다는 ‘오버한’ 버전도 있다) 가져왔다는 전설. 이렇게까지 사오는 이유는 이걸 사다가 다시 한국에 팔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원가의 몇 배를 남겨 먹을 수 있었다나?

무엇보다 유명한 얘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대격노 설이다. 당시 밥솥을 굴려 가며 가져올 만큼, 주부들의 일제 밥솥을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대통령의 귀에까지 들어갔단다. 대통령은 곧 실무진을 불러놓고 “야이 밥통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 밥통들아! 6개월 줄 테니까 우리도 이거 만들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가뜩이나 권위주의적이고 경직적인 공직사회. 면전에서 ‘밥통들’이라는 소리를 들은 실무진들(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음이 틀림없다)은 그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고, 또 얼마나 황망했을까. 근데 이 얘기 실화일까?

실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83년 2월 25일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은 무역진흥월례회의를 주재하며 오찬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한다. “우리 제품도 훌륭한데 끝마무리가 좋지 않은 것이 흠이다. 내가 봐도 국산 전기밥통의 질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우리의 일부 층에는 일제 선호의식이 있지만, 우리 제품의 질이 좋으면 사지 말라고 해도 모두 국산품을 살 것… 중략.”

공식 석상이다 보니 말을 가려서 한 것이지, 대통령이 직접 특정 상품에 대해 공석에서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비공식적 자리에서 실무진들은 분명 ‘밥통들’에 준하는 일갈을 들었을 것이다.

◇밥솥만 문제?…기술 후발주자 한국

전근대 일본의 문호 대개방, ‘메이지 유신’은 1868년에 시작됐다. 여러 평이 있지만, 전근대 조선의 문호 개방은 실패했다고 평가되며, 결국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돼 버린 한국은 기술 발전이 제자리걸음을 걷는다.

원천 기술은 모두 사실상 본토인이나, 본토인의 준하는 친일 인사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과 거의 수십년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기술 격차를 안은 채 독립했다. 세계 시장은 그같은 한국의 사정을 봐 줄 만큼 녹록한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 기술격차 그대로 한국은 세계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해야 했다.

▲한국 산업기술 격차 극복의 상징적 인물이 정주영 회장이다. 그 일화 중 하나로 당시 500원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며 그리스로부터 조선 수주를 따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실제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국가보증을 서주었기 때문에 성사된 계약으로, 당시 기술격차를 따라잡기 위한 민‧관의 처절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출처=연합뉴스TV '기업비사' 캡처)

밥솥뿐이 아니다. TV, 냉장고, 자동차, 철강, 조선, 식품, 의류, 건설, 석유화학… 과거의 한국 산업 대부분은 일본과 큰 기술 격차를 안은 채로 경쟁에 나섰다.

일본의 오랜 시간 이어진 안정기(버블 붕괴 전이다)동안 풍부한 기초과학우수한 응용과학을 토대로 빚어낸 야심작(?), 코끼리표 밥솥 하나 못 만드는 이유가 ‘관료들이 밥통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관료들에게 너무한 감이 있다. 애초에 시장에서 상품을 만드는 건 관료들이 하는 일도 아닌데….

차관 도입, 대기업 몰아주기, 로열티 지불, 산업스파이, 역설계, 그냥 노력(?) 등 민‧관이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오만가지 방법을 동원한 노력이 몇 십년간 이어졌다. 국가적 역량을 일부 희생하다시피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은 드디어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 설 만한 기업을 몇 곳 배출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곧 국부(國富)의 원천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야만 했다. 인구도 5000만의 소국이라 내수 시장만으로는 경제 성장이 어려운 나라. 자원도 척박해 수출할 만한 원천자원도 없는 나라. 남의 물건을 사다가 가공해서 팔아야 하는 이 작은 중개무역국가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탈출구는 기술 발전뿐이었다.

다행히 이제 일본에서 코끼리표 밥솥을 데굴데굴 굴려 사오던 이야기는 ‘옛날 옛적에’ 그랬더라는 유머 정도로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 근데, ‘붉은 여왕 효과(The Red Queen hypothesis)’라는게 있다. 모든 참여자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필드에선 누군가 잠시라도 멈추면 그대로 뒤처지게 된다는 법칙이다.

혹시 모를 일이다. 잠깐 기술 발전이 잠시 멈춰진 사이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점유율이 소니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일이고, 반도체 점유율이 도시바에 먹힐지도 모를 일이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아마 코끼리표 밥솥 만들던 업체인 조지루시도 80년대에는 그렇게 낙관하지 않았을까.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