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39. 명필(名筆)은 만년필을 가리지 않는다?

입력 2019-05-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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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연구소장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 즉,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고사성어는 중국 당나라 태종(이세민 599~649) 때 3대 명필이었던 구양순(557~641), 우세남(558~638), 저수량(596~658)이 등장하는 ‘당서(唐書)’ 구양순전(歐陽詢傳)과 관련이 있다. 이들 3대 명필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저수량은 글씨를 쓸 때 꽤나 붓과 먹을 가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저수량은 한참 선배인 우세남에게 자기와 구양순의 비교를 구하는데, 이에 우세남은 “그는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사용하여도 자기 마음대로 글씨를 쓴다고 하네. 그러니 자네는 그에게 미치지 못할 걸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짧지만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당대에 한 명 나오기도 어렵다는 명필이 세 명이나 등장하고 그중 한 명이 호기를 부리다가 선배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결론까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면 이 이야기가 기록된 당서는 수백 년 뒤에 기록된 것이고, 저수량과 다른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마흔에 가까워 상식적으로 그런 이야기가 오고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정말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았을까? 구양순 이전의 명필인 채옹(133~192)에 관한 기록인 ‘삼보결록(三輔決錄)’을 보면 “채옹은 글씨를 잘 쓴다고 매우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사와 조희의 필법에 모두 밝고, 고운 깁이 아니면 함부로 글씨를 쓰지 않으며, 장지의 붓, 좌백의 종이와 신(臣)의 먹을 씁니다.” 여기서 화자인 신은 위탄(179~253)이다. 위탄은 먹과 붓을 잘 만들었는데 그 역시 서예를 잘해서 광록대부(光祿大夫)란 벼슬까지 올랐던 명필이었다. 중간에 ‘장지의 붓’으로 등장하는 장지 역시 초서로 아주 유명한 명필이었고 붓을 만드는 실력도 뛰어났다. 그 유명한 서성(書聖) 왕희지(303~361)는 평범했을까? 당(唐) 장언원의 ‘서법요록(書法要錄)’에 “왕희지는 잠견지(蠶繭紙·누에고치로 만든 비단 종이)와 서수필(鼠鬚筆·쥐 수염 털로 만든 붓)로 난정집의 서문을 썼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왕희지 역시 붓과 종이를 고르는 데 아무것이나 선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구양순 이후 기록인 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 보면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 전서(篆書) 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펠리칸 M800
만년필은 어떨까? 만년필도 마찬가지이다. 동양과 서양 할 것 없이 만년필이 각광을 받던 때는 글씨를 잘 써야 하는 시대였다. 때문에 만년필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게 만들어졌다. 고를 수 있는 스펙트럼 역시 매우 넓다. 아주 가늘게 써지는 극세필(EF)부터 세필(F), 보통(M), 굵은(B), 가장 굵은(BB) 것까지 있다. 누르면 펜촉이 잘 벌어지는 연성(軟性)이 있고 덜 벌어지는 경성(硬性)이 있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연성 펜촉의 모양은 버드나무 잎처럼 홀쭉하게 생겼고, 경성은 반대로 통통한 편이다.

만년필의 무게 역시 천차만별인데 범위를 좀 좁혀보면 성인 남성의 경우 25~30g을 무겁지 않다고 느끼고, 여성은 7g 정도 가볍다. 무게중심은 가운데보다 전체 길이의 60% 정도 후중심이 좋고 굵기는 1.3㎝ 이내를 편안하게 느낀다. 몸통의 재질 역시 금, 은 등 셀 수도 없이 많은데 가벼운 플라스틱이 아니면 앞서 적은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 참고로 만년필 전문 잡지에서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연속 1위를 한 펠리칸 M800은 공식적으로 28.2g(잉크 제외)에 재질은 플라스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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