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호의 고미술을 찾아서] 도굴, 야만 또는 욕망의 실루엣?

입력 2019-05-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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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평론가, 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망하지 않은 나라 없었고 도굴되지 않은 무덤 없었다.” 만연한 도굴 세태를 풍자하는 중국 속담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중국의 도굴 사랑(?)은 현대에까지 이어져 청나라 서태후의 무덤은 그녀가 묻힌 지 겨우 19년이 지난 1928년에 도굴되었고, 강희제의 무덤도 1945년에 도굴되었다. 후장(厚葬)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 도굴은 피할 수 없는 관례였고 다만 그 시기가 궁금할 뿐이었다.

우리는 어땠을까? 관련 문헌을 살피다 보면 조선시대에 대명률(大明律)의 ‘발총률(發塚律)’을 준용해서 도굴행위를 엄격히 처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도굴은 부장품의 취득 목적이 아닌 원한에 대한 복수 또는 치죄(治罪) 성격의 도굴임이 분명하다. 사후에 중죄가 드러나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 목을 치는 부관참시(剖棺斬屍)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우리 역사에서 부장품을 취하기 위한 도굴이 흔치 않았던 것은 기본적으로 후장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데다 조상 영혼의 안식처를 잘 보존하는 사회적 규범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통은 일제강점기를 맞으면서 시련에 직면한다. 통감부가 설치된 무렵부터 이 땅에 몰려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에 의해 불법 도굴이 자행되었고 강제병합 이후는 더 심해져 전 국토 곳곳이 벌집모양처럼 파헤쳐졌다. 당시 도굴과 도굴품 장사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에 이르렀고, 개성, 강화, 경주, 부여 등지의 고대 왕릉이나 분묘는 죄다 도굴되었다는 기록과 증언은 차고 넘친다.

이 땅의 도굴은 이민족의 침략 때 그 만행의 전례가 있긴 하지만, 씨를 뿌리고 번성케 한 주역은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들여와 퍼뜨린 야만의 문화는 해방이 되면서 시들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저들의 도굴 행태를 보며 또는 하수인으로 일하던 사람들이 생업으로 그 일을 계속하거나 가게를 차리면서 도굴은 이어졌다. 우리 스스로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1950~60년대 먹고살기에 바빴던 시절, 도굴은 누구에게는 생업이었고 누구에게는 횡재를 꿈꾸게 하는 신기루였다. 거기서 나온 도굴품의 상당 부분은 해외로 흘러 나갔고 일부는 국내 컬렉터 수중으로 들어갔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력이 축적되면서 고미술품 수요가 늘고 가격이 오르자 도굴은 더 기승을 부렸고, 멀쩡히 관리되던 무덤도 그 마수를 피해가지 못했다. 무덤만으로 성이 안 찼던 도굴꾼들은 석탑 등 불교 유적에 손을 대기도 했다. 석가탑 도굴 시도(1966)와 건봉사 사리탑 도굴(1986) 사건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도굴 열풍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진정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더 이상 도굴할 만한 무덤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인에 대한 존숭의 상징인 무덤을 도굴하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엄한 비난과 처벌의 대상이었음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이어온 이유는 뭘까?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듯이, 도굴품의 유혹에 포획된 컬렉터가 있는 한 도굴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도굴품인 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컬렉터의 숙명과 같은 수집 욕망은 그렇게 도굴의 추동력이 되어왔다.

그렇다고 어찌 그들만의 문제일까?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여러 차례의 외침으로 지상의 유물은 대부분 사라졌고 그나마 남아 있던 것들도 일제의 약탈과 6·25 전란 등으로 멸실된 상황에서 도굴은 소중한 문화유산의 주된 공급원이 되어왔다. 도자기의 경우, 단언컨대 조선 후기 만들어져 전세(傳世)된 백자를 제외하면 거의가 도굴된 것이다. 그 비난받는 도굴을 통해 수습된 유물들이 이곳저곳 박물관에 전시되어 우리 문화와 역사를 증거하고 한편으로 민간의 컬렉션 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화유산의 수집과 보존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야만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더불어 컬렉션 욕망의 실루엣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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