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성락 칼럼] 한미정상회담 이후, 우리가 할 일들

입력 2019-04-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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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 객원교수

일전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보면서 맨 처음 든 생각은 ‘형식이 본질을 이렇게 좌우할 수 있구나’였다. 정상회담의 진행절차는 형식에 속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일이 이상하게 되면 회담내용이라는 본질이 중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정상회담의 시작 부분은 언론이 취재하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진행된다. 진행절차는 정하기 나름이지만 대체로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첫째는 정상끼리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을 언론이 제 3자로서 취재하고 촬영하는 방식이다. 그러다가 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언론은 나가고 회담은 비공개로 전환된다. 둘째는 정상들이 언론을 상대로 인사말을 하고 간단한 질의도 받는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방식을 자주 택하였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도 이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도 시작하기 전에 회담의 주요 주제에 대해 언론에 단정적인 언급을 해 버린 데 있었다. 기자들은 제재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제재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빅딜과 스몰딜에 대해서 묻자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을 추구하고 있다고 답하였다. 3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응할 용의를 표명하면서도, 서두르기보다 시간을 두고 준비해야 한다고 하였다.

바로 옆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있었다. 회담을 앞둔 문재인 대통령의 주 관심사는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중단 위기에 놓인 미북 협상을 복원시키고, 비핵 평화 이슈의 진전을 기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측이 제재해제나 빅딜, 그리고 3차 미북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미국 측의 유연성을 주문할 것으로 예상되던 차였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언급이 이런 식으로 먼저 나와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언론은 그 후 실제 회담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졌을지와 상관없이 회담에서 성과가 없었다고 보게 되었다. 언론의 그런 예단이 성급하다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사실 모두에 공개적으로 이런 언급을 해 버린 트럼프 대통령이 실제 회담에서 이와 다른 입장을 취했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형식의 문제가 본질의 문제에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사실, 회담 전에 상대 정상 앞에서 상대방의 주 관심사에 대해 언론에 가타부타하는 것은 외교 관행상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질문이 있더라도 대체로 답변은 ‘오늘 유익한 현안 논의로 양국 관계가 더욱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투의 간단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상례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렇게 대응한 데에는 고의성이 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예측 불가한 성격과 즉흥적인 스타일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이번 결과가 당혹스러운 것이므로 앞으로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할 때에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상 언론과 질의응답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적어도 회담에서 논의될 본질적 내용에 대해 회담 전에 미리 예단하는 식의 답변은 없도록 조치를 해두어야 한다.

이처럼 회담 모두의 질의응답 소동 때문에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처음부터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 후 흘러나온 협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긍정적인 결과가 없지는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계속 협상할 의지를 분명히 하였고, 김정은 위원장과의 개인적 관계를 강조하며 3차 미북 정상회담의 여지도 열어 두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에 대한 선호를 밝혔으나, 스몰딜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협상 복원을 위해 역할을 하는 데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11일 오후(현지시각)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워싱턴/뉴시스

그렇다면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미북 간 협상의 틀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긍정적인 메시지를 발신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질 측면에서 하노이에서 드러난 상호 입장차를 좁힐 단초를 찾지는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비핵 평화 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달성하려 한다면, 하노이에서 노정된 미북 간의 입장차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밖에 없다. 이는 불가피하게 양측 모두의 절제와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쪽의 유연성이 확보되지는 못한 것이다. 제재문제가 그렇고 빅딜 또한 그렇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스몰딜을 배제하지 않는 언급을 한 점이 유연성의 여지를 시사하고 있기는 하다.

이 정도의 결과로는 북한으로부터 유연성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한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 접촉을 통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역할을 하려고 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진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후 북한이 내놓은 반응은 일단 부분적으로나마 긍정적인 것이었다. 한미 정상회담 직후,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싱가포르 이후 하노이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보인 대처를 맹비난하였으나, 트럼프 대통령과의 개인적 관계를 거론하면서 연말까지는 협상을 지속하겠다고 하였다. 3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도 표명하였다. 시한부이기는 하나 협상 지속을 천명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관계를 높이 평가하면서 추가 정상회담 가능성을 열어둔 데 대한 화답성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북한은 영변에서 핵물질 관련 움직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고, 신형 유도 무기 실험도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협상에서 배제하라는 요구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런 행동들은 대화 분위기를 저해하는 것이지만, 과거에도 북한은 협상을 앞두고 이런 도발적 자세로 미국을 채근하고 자신의 협상 입지를 강화하려고 해왔다. 북한이 협상에 대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행보인 것이다. 그러니 조만간 미북 간에 협상이 재개될 가능성은 상당하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에 북한은 한미 정상회담 이후에도 우리와의 접촉 중단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소지가 있다. 우리를 미국과 이격시키려는 압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북한이 미국과 협상하는 동안 우리에 대해 이런 식의 게임을 하는 일도 상투적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조급하게 대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조급할수록 북한이 이를 활용할 것이고 우리 입지는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의연히 여유를 갖고 대처해야 한다. 어차피 미북 협상이 복원될 전망이니 조급할 이유도 없다.

혹자는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이 부각되는 큰 외교 이벤트가 없는 점을 우려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미북 협상이 복원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우리가 눈에 띄는 역할을 해야만 협상이 진전되는 것도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모양새보다 비핵 평화 협상의 실질 내용이 우리 국익에 맞는 방향으로 진전되도록 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가 역할을 하지 않아도 협상은 재개될 전망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의 관심은 하노이에서 등을 돌린 미북이 다시 대좌하였을 때 서로 간에 접점을 찾을 수 있을지, 그 접점은 한국에 바람직한 것일지, 또 협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한국이 할 수 있는 역할과 기여는 무엇일지에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주러시아대사,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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