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호의 고미술을 찾아서] 규방(閨房)에서 피어난 조각보의 아름다움

입력 2019-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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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평론가, 전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

우리 고미술 가운데 고유의 조형미와 민예적 아름다움으로 많은 애호가들을 매혹하는 분야가 몇몇 있다. 예를 들면 노리개, 자수, 보자기 등이다. 이들 물건은 대부분 규방 여인들의 손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된 탓에 그네들의 정성과 손때가 짙게 배어 있다. 주로 중장년층 여성 컬렉터들이 즐겨 찾는 물건들이지만, 색채미가 뛰어난 데다 장식적 요소까지 두루 갖춤으로써 젊은 세대들의 취향에도 맞아 수요층을 넓혀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조각보의 아름다움은 특별하다. 조선의 여인들은 한 변이 석 자 안팎의 작은 사각의 평면에 그네들의 원초적 미감을 담아 삶에 체화(體化)된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바로 삶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는, 삶 속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래서 표현은 본능적이고 느낌은 생동적이다.

민예품이 다 그렇듯 조각보도 삶과 더불어 만들어지고 사용되다 소멸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거기에다 내구성이 떨어지는 재료적 취약성이 더해지다 보니 온전히 보존되어 전세(傳世)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 연유로 지금 남아 있는 조각보는 대체로 그 연륜이 백오십년을 넘지 못한다. 당연히 조각보의 역사적 연원을 풀어내기가 어려웠고 미학적 논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리 조각보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소급하는 유물이 홀연히 나타났다. 2005년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의 개금불사 과정에서 1490년 복장(腹藏)에 넣어진 일곱 색상의 조각보 2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 조각보의 역사가 적어도 조선 초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뜻하지 않는 데서 유물이 발견되고 역사의 빈 공간이 메워지는 행운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조각보는 기본적으로 생활용품이었다. 상에 차려진 음식을 가볍게 덮는 것에서부터 혼례용품을 싸는 것에 이르기까지 용도는 다양했고, 사용 계층에 따라 소재와 만드는 방법도 달랐다. 수가 놓인 의례용의 화려한 비단 조각보가 있는가 하면 거친 삼베 모시 조각보도 있다. 조각보의 제작 동기나 배경을 유추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처음에는 버리기 아까운 천 조각을 심심풀이로 잇는 것에서 시작했을 테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여인들은 그 평범한 사각 평면에 다산과 수복강녕의 소망을 담았고, 의례의 격식을 갖추려는 엄정함을 더했다. 그 모든 것이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시작되고 마감되어 마침내 하나의 구성이 되고 만다라가 되었다.

조각보는 서양의 퀼트(quilt)와 비슷한 데가 있다. 조각 천을 이어 붙이는 것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유물이 남아 있어 조선 고유의 미술 양식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조선 여인들의 무심으로 이루어낸 아름다움의 질서와 조화가 훼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류의 미술활동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민예적 요소에 조선 여인들의 본능적 미감이 더해짐으로써 그 아름다움의 실체를 드러낸 뛰어난 미술활동의 성취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풍부한 역사성과 미술적 감성이 담긴 조각보는 기하학적 선과 뛰어난 면 구성, 화려한 색의 조화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인정받아왔다. 현대 서양의 색면 추상화에 견주어도 조형미가 전혀 뒤지지 않는다. 조선 여인들의 몸에 내재된 민예정신과 창작본능이 응축된 아름다움을 어찌 이 시대 사람들의 온갖 잡념(?)이 들어간 색면 추상화의 그것에 비길 것인가! 이 땅의 여인들은 저들이 자랑하는 몬드리안(1872∼1944)보다 수백년 앞서 기하학적 무늬의 색면 추상화를 창작한 것이다.

민예적 아름다움으로 과거가 현대를 품은 조각보. 그 사각의 평면에는 옛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꿈꾸었던 지극한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나는 소망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와 전통이 숨쉬고 미술이 숨쉬는 세상이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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