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도의 세상이야기] 힘 빼는 법

입력 2019-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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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객원교수,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언제부터인지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직장 생활 중 해외여행을 갔을 때 짬을 내어 미술관을 가보곤 했습니다. 파리의 루브르, 오르세처럼 세계적 명화를 소지한 미술관에서 다빈치,모네, 피카소의 걸작을 보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그런데 베트남 하노이 국립 미술관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그 나라 공훈 화가들이 그린, 소위 선전용 그림을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 그 시대 상황과 작가의 표현 방식을 공부하니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그냥 남이 그린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려 보기로 했습니다. 사물을 그린다는 것은 사진 찍기보다는 내 나름대로 해석하며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매우 끌렸습니다.

무슨 그림을 그릴까? 유화, 수채화, 파스텔화, 동양화 등등 다양하지만 오래전 중학교 시절 그려보았던 수채화를 시작하였습니다. 학원을 알아보니 동네에 있는 학원들은 입시 위주라 맞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직장인을 위한 취미학원이 있어 등록하고 한 일 년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소묘도 제대로 되지 않고 채색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였습니다. 수채화는 맑은 물을 사용하여 그리기 때문에 덧칠하거나 수정이 어려워 한 번 채색을 잘못하면 망칠 것 같은 두려움에 쉽사리 붓질을 못하게 됩니다. 붓을 잡은 어깨에 힘만 잔뜩 든 채로 어쩔 줄 몰라 할 때 선생님이 거들어 주고 나서야 겨우 한 번 두 번 붓질을 합니다.

‘힘을 빼야, 아니 힘을 뺄 줄 알아야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구나.’

그리고 나서 이 그림 저 그림 좋은 풍경이 있으면 그려 보았습니다. 이제 겨우 그림 모습이 나는지 페이스북에 올린 졸작에 많은 폐친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거나 댓글을 달아 격려해줍니다. 그러나 아직도 붓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갑니다. 원근과 명암을 제대로 표현해야 그림에 생동감이 생길 터인데 여전히 힘 조절이 어렵기만 합니다.

그만둘까 하다가 이시형 박사의 수필집 ‘여든 소년 산이 되다’를 읽고 마음을 다시 고쳐 먹었습니다. 이 박사는 나이 여든이 되어 비로소 시작한 문인화를 엮어 한 면에 그림을, 다른 한 면엔 유려한 필체로 해설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림만 있으면 어르신의 거친 필체로만 느꼈을 텐데 해설이 붙으니 그림이 삽니다. 아니 그의 그림은 저 같은 범부에게는 전문 화가의 작품보다 더욱 순수하고 편안한 맛이 있습니다. 더구나 해설을 보면 또 다른 그의 인생 깊이가 느껴집니다.

‘아 그림은 잘 그려야만 맛이 아니구나.’

여든이 되어 힘을 빼고 그리니 아마추어의 그림도 색다른 느낌이 듭니다.

올해 들어 새롭게 시작했습니다. 이 박사의 책에 힘입어 수묵화를 그리기로 했습니다. 수묵화는 채색을 가하지 않고 먹만을 사용하여 그린 그림입니다. 서양화에서 색으로 간주하지 않아 무채색이라고 하는 흑과 백의 농도만을 활용하여 그립니다. 더구나 밑그림도 없이 그리니 붓을 잘 다루지 않으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집중이 더욱 필요하고 붓을 잡은 손은 힘을 넣고 뺄 줄 알아야 합니다. 곧게 뻗은 대나무를 그릴 때 힘만 주어서는 지조 있게 그릴 수 없습니다.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나무 가지를 힘껏 그려 선생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칭찬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격려도 기대했는데 의외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림에 혼이 담기지 않고 힘만 잔뜩 들어 대나무 가지가 곧게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힘을 빼야 한다!’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힘이 잔뜩 들었습니다. 주어진 정책 과제의 엄중함, 조직 생활에서 지켜야 할 윤리, 승진을 위한 치열한 경쟁 등등 긴장하다 보니 어느새 쓰는 말투도 그렇고 몸에도 쓸데없는 힘이 잔뜩 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 생활에서 힘이 들어가면 상대방에게 거부감만을 주고 저도 불편하기만 합니다. 당장 가까운 사이에서 만나 아무렇지 않게 한 이야기가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조직을 움직이다 보니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구성원별로 무엇을 하고 내가 무엇을 하지 하는 분업 구조를 생각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집이나 개인적 일에서는 솔선수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을 빼야지!’ 안 그러면 나만 외로워지고 힘들어집니다. 서로 상생하려면 내 주장만 하기보다 힘 빼고 남의 이야기도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배 중에는 조직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힘겨운 인생을 산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이 박사가 그림을 곁들여 쓴 글 하나하나가 되새길수록 삶의 보석입니다. 한 구절 소개해 봅니다.

“눈보라와 엄동설한을 묵묵히 견딘 나목(裸木)은 새봄이 오면 제일 먼저 찬란한 꽃을 피웁니다. 사람에게도 혹독한 진통의 계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움츠러들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는 자에게는 반드시 봄이 찾아옵니다.”

풍란에 힘이 들어 있었으면 추운 겨울 세찬 비바람에 부러져 새봄을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생의 이모작을 시작하는 분들 중에 혹시 힘을 빼지 못해 힘이 드는 분들께 수묵화를 그려 보시길 감히 권해 봅니다. 저도 올봄에 난초를 부드럽고도 힘있게 힘을 빼고 그려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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