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입력 2019-04-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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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장소, 사람을 앎으로써 천하의 부(富)를 평정하다

춘추시대 말, 오나라와 월나라 간에 전개되었던 복수혈전은 매우 유명하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나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은 모두 이로부터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월나라가 마침내 오나라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범려(范蠡)라는 유능한 명참모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 범려라는 인물이 그의 인생 후반을 탁월한 경영인으로 살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목적 이룬 군주 곁에 오래 있는 건 위험

범려는 본래 초나라 사람으로 월나라에서 대부(大夫)의 자리에 있으면서 월나라왕 구천(句踐)을 보좌하여 오나라에 복수를 하고 마침내 천하의 패업(霸業)을 이루게 하였다. 구천은 범려에게 상장군(上將軍)이라는 최고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범려는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구천은 나라를 반으로 나눠 범려와 함께 다스리겠다며 만약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서라도 듣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목적을 달성한 군주 곁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하다. 구천은 고생을 함께 나눌 수는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 나누지는 못할 인물이다.’

이렇게 생각한 범려는 다른 곳으로 몰래 떠나 자신의 남은 삶은 상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고는 조용히 자신의 재산을 수습하여 이름을 바꾸고 가족과 노비를 이끌고서 배를 타고 떠났다. 범려가 떠난 사실을 뒤늦게 안 구천은 몹시 슬퍼하며 회계산 일대를 모두 범려의 땅으로 선포하였다.

▲월나라 왕 구천을 보좌하여 오나라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자 자리를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범려. 그의 인생 후반은 탁월한 경영인으로 살아 중국에서는 상성(商聖)으로 추앙받는다.

商業으로…차원이 다른 비범한 선택

처음에 그는 상업이 발달한 제나라에 도착하여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칭했다. 본래 치이(치夷)는 소가죽으로 만든 자루라는 의미로서,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伍子胥)를 자결하게 만든 뒤 치이에 싸서 강물에 버렸던 일에서 오자서를 동정하는 뜻으로 스스로 치이자피라고 한 것이다. 치이자피는 겉으로 보기에는 촌스럽지만 실제로는 신축자재하여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그 안으로 많은 양이 들어갈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이렇게 범려는 자신의 이름 대신 별칭을 사용함으로써 타지에서 사업을 개척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교류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었다.

그는 제나라 해변가에서 자식들과 함께 모든 힘을 쏟아 땀 흘리며 밭을 갈아 재산을 모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자 제나라에서 범려에게 재상으로 와달라고 간청했다. 범려는 탄식했다.

“들판에서 천금의 재산을 모으고 관가에서 재상의 벼슬에 오르니 그 이상의 명예가 없다. 그러나 명예가 계속되면 오히려 화근으로 된다.”

범려는 제나라의 요청을 사양하고 재산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다음, 특별히 값나가는 몇 개 보석만을 몸에 지니고 몰래 제나라를 떠나 도(陶)나라로 갔다. 그는 도 지방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각국 제후들과 사통팔달하여 화물 교역의 요충지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곳에서 사업을 경영하여 물자를 비축하고, 적절한 때에 맞추어 변화를 도모하였다. 그는 스스로 도주공(陶朱公)이라 칭하고 아들들과 함께 농경과 목축에 힘썼으며, 물가의 변동에 따라 시세 차이가 나는 물건을 취급하면서 자기는 단지 1할의 이익만을 가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수만금의 재산을 가진 거부가 될 수 있었고, 세상 사람들은 도주공을 칭송하였다.

榮華를 미련없이 버리고 貨殖활동에

무릇 경영에 뛰어난 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선택하고 좋은 시기를 파악할 줄 아는 법이다.

범려는 천시(天時)에 맞춰 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뛰어났으며, 자기가 고용한 사람을 결코 야박하게 대접하지 않았다. 그는 장소를 알고(지지, 知地), 때를 알아(지시, 知時)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도주공 범려는 ‘때를 알아보는’ ‘지시(知時)’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治國)에 그토록 능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토록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월나라 왕 구천을 보좌하면서 자신이 군사 분야를 담당하면서 한편으로 능신(能臣)인 대부 종(種)을 추천하여 국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그런데 이 대부 종은 자신의 공만을 믿고서 위험하니 물러나야 한다는 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은 채 월나라의 벼슬을 받고 남아 있다가 결국 구천에게 반란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자결을 강요받아 비참하게 삶을 마감해야 했다). 뒷날 오나라 왕 부차가 간신배 백비의 참언만 믿고 충신 오자서를 죽였을 때, 구천은 범려에게 오나라에 대한 공격의 때가 되었는가를 물었다. 하지만 범려는 아직 시기가 성숙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때가 아니라고 답하였다. 그 뒤 부차가 스스로 천하의 패자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북방으로 행차하고 후방이 텅 비게 되었을 때, 범려는 이제야말로 때가 왔다고 진언하였다. 그리고 총공격에 나선 월나라는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범려는 가장 커다란 공을 세우고도 그 영화(榮華)를 미련 없이 버리고 화식(貨殖) 활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탁월한 군사 능력으로써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시기를 포착하는’ 눈으로써 천하의 부(富)를 평정할 수 있었다.

▲중국 허난성(河南省) 난양(南陽) 범려의 고향에 있는 알림판.

대정치가이며 대사업가

범려는 진정한 대사업가였다. 그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사업 파트너를 선택하여 상대방을 충분히 신뢰하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결코 남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인격적 매력은 도량이 넓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그를 위풍당당한 대정치가로 만들었던 것이며, 동시에 그가 정계에서 홀연히 사라져 홀로 깨끗했을 때에도 여전히 능히 천하를 구제하고 자신이 모은 재산을 다시 한번 자기와 별로 교류가 없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허명(虛名)을 분토(糞土)처럼 여겼고, 오직 숨어서도 자신의 모습이 보일까 걱정하였으니 이러한 그의 도덕 품격은 일반적인 부자들의 범상한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좋아하는 행적과 명리(名利)에 담백한 그의 풍모 그리고 관후인자(寬厚仁慈)한 그의 품격은 인간에게 무엇이 과연 지혜로운 것이며 차원이 다른 삶의 비범한 선택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마천은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에서 범려가 남긴 탁월한 역사적 역할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이어 ‘화식열전’ 편에서도 그 첫 번째 인물로 범려를 선정하여 기술하면서 시종 그를 마땅히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칭송하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범려는 19년 동안 천금의 재산을 세 번씩이나 모았으나 그중 두 번은 가난한 벗들과 일가친척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야말로 ‘그 재산으로써 은덕을 널리 베푸는 군자’가 아니겠는가! 그가 나이가 들고 힘이 떨어지자 자손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자손들은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계속 재산을 늘렸고 그들의 가산은 무려 억 금도 넘게 되었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부자를 말할 때마다 모두 도주공(陶朱公)을 언급하게 되었다. 범려는 세 번이나 옮기고도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그가 멈추는 곳에서는 반드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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