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의 시사 인문학] 조급함은 조잡과 실패를 낳는다

입력 2019-02-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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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칼럼니스트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는 속담이 있다. 속담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 속담 역시 어떤 상황에서 생겨났는지 알 길이 없다. 몇 가지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다.

여러 식구가 좁은 방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하는 가난한 형편에서 생겨난 걸로 볼 수 있다. 많은 식구가 좁은 방에서 같이 잠을 자려면 다리를 함부로 뻗어선 안 될 것이다. 까딱하면 할아버지의 발이 어린 손주의 가슴을 내리누를 수도 있고 며느리의 다리가 시어머니의 얼굴에 올라가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잠결에라도 다리를 뻗을 때는 다리 뻗는 방향의 공간을 살펴봐야 한다. 때로는 구부리고 자야 하는 불편도 감수해야 하고.

혹시 이 속담은 감방 생활에서 생겨난 게 아닐까? 좁아터진 감방에 여러 죄수가 갇혀 있다. 죄수 중에는 전과(前過) 화려한 ‘범털’이 있을 수 있다. 신참 ‘개털’ 주제에 잠결에라도 ‘범털’의 공간을 침범했다간 무슨 곤욕을 치를지 모른다. 이런 데서 다리를 펴느냐 구부리느냐는 문제는 실로 생사가 걸린 중대사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시나리오로, 낯선 여러 사람이 좁고 허름한 여관방에 묵는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낯선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자는 상황이다. 상대를 전연 모르니 다리를 펼 때 조심해야 한다는 점에서 감방을 공유하는 경우와 다를 게 없다. 주먹깨나 쓰는 사람의 몸에 내 다리나 발이 닿았다가는 멱살을 잡히거나 두들겨 맞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무탈하게 지나려면 다리를 뻗을 때 신경을 곤두세우는 수밖에 없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

어쨌든 중요한 건 다리 뻗을 때는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견 이 속담은 어려움에 처한 약자들을 향한 소극적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좀 더 유심히 살펴보면 이 속담은 훨씬 깊은 속뜻을 담고 있다. 우선, 개인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행동과 연결해 생각해 보자. 누울 자리에 전연 신경 쓰지 않고 다리를 뻗는 게 과연 현명한 자세가 될 수 있을까? 외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행동이 실제로 적합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내 결정이나 행동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외부 환경에 대한 고려는 깊어야 한다. SWOT분석 용어를 빌리면 내 행동과 관련하여 외부 환경은 기회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나,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나 살펴야 한다.

누울 자리를 온전히 파악하려면 나의 다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설령 공간이 내가 다리를 쭉 펼 만하더라도 다리를 편 상태로 있는 게 오히려 내 몸에 해롭다면 무턱대고 다리를 뻗는 게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SWOT분석에서 내부 환경(행위주체)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 검토하는 일에 빗댈 수 있다.

이와 함께 꼭 살펴봐야 할 점은 지속 가능성이다. 당장은 안심하고 다리를 뻗고 자도 좋은 공간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수도 있다. 계속해서 다리를 뻗어도 괜찮은지 알아보지도 않고 내내 활개 펴고 자다가는 의외로 큰코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누울 자리를 제대로 본다 함은 외부 환경과 자기의 역량은 물론이고 그 행동의 지속 가능성 여부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말과 같다. 결국, 이 속담은 소시민의 수동적 처세술에 불과해 보이지만 새겨볼 만한 가치를 제법 지니고 있다. 표현은 뭉툭하지만 내용은 꽤 의미심장해 보인다.

▲전북 전주시 전북도청 공연장 건물에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축하하는 문구가 적혀 있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세금 24조1000억 원에 해당하는 23개 지역사업에 대한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결정이 자칫 과거의 사례처럼 의욕만 앞서 세금을 낭비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전주/뉴시스

‘예비타당성조사’를 둘러싼 논란

정부는 최근 세금 24조1000억 원에 해당하는 23개 지역사업에 대해 ‘예타면(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결정을 내렸다. 엄청난 국가사업에 대해 예비 타당성 조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울러 대통령은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현행 예비 타당성 조사 방식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타당성 심사에서는 ‘국가 균형 발전’ 항목 비중이 이전보다 커질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현재는 평가항목 중에서 경제성 비중이 가장 크고(35~50%) 국가 균형 발전 비중은 비교적 작게(20~30%) 반영되고 있다. 만약 이 두 항목의 반영률이 서로 바뀌거나 대등해지면 사실상 예비 타당성 조사 제도의 본래 의미가 크게 퇴색하고 만다.

언론에 따르면, 엄격한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여러 사업 중에도 당초 기대했던 바와 달리 실패한 사례가 적지 않다. 꼼꼼한 타당성 조사를 통해 추진함이 적합하다고 판정받은 국가사업 중에도 실제 추진해보니 타당하지 않음이 드러난 사례가 꽤 있었다는 말이다.

의지·의욕만큼 필요한 ‘냉철함’

예비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는 목적은 대형 신규 공공투자사업이 지니는 정책적 의의와 경제성을 올바로 판단하고 사업의 효율적 현실적 추진 방안을 제시하는 데 있다. 수요가 별로 없거나 경제성이 신통치 않은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지 않도록 예방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예비 타당성 조사를 면제하는 다양한 경우 역시 관련 법령에 상세히 명시돼 있다.

굳이 예비 타당성 조사의 필요성을 따져 볼 수준이 아니더라도 정부가 시행, 추진하는 다양한 사업 중에 어느 측면에서든 간단하거나 사소한 것은 별로 없다. 막대한 세금이 장기간 투입되는 사업들이 대부분이다. 국가사업에서 ‘백년대계’ ‘역사적 과업’이란 표현은 한갓 비유가 아니다. 단언컨대, 설령 주도면밀(周到綿密)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더라도 사업 시행에 필요한 예산이나 기대 효과 또는 부작용 등을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렵다. 불가능하다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장기간 꼼꼼히 따져보더라도 그렇다. 인간의 예측 능력에는 원래 상당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예비 타당성 조사는 국가적인 거대 사업을 추진함에 필수적이고 중요한 절차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를 가능한 한 우회하고 싶어 하는, 마지못해 거쳐야 하는 절차쯤으로 여기는 건 매우 위험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인 국가사업을 추진하려면 굳센 의지와 강한 의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정도의 냉철함이 요구된다. 뜨거운 사명감과 아울러 정교하고 치밀한 전략과 실행계획, 이런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추진되는 사업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거대 국가사업에 매우 의욕적이고 추진 목적이 나라의 균형 발전임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의욕이 앞선 나머지 조급함이 지나치다는 데 있다. ‘예타면’ 사업에 대한 최근 대통령의 언급에 따르면, 국가의 균형 발전 측면에서 신속, 과감하게 추진해야 할 국가 대형 사업들이 예비 타당성 조사에 발목이 잡혀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금만 쏟아붓고 실패한 국가사업들

조급함은, ‘누울 자리 파악’에 비유하면, 자기 역량과 외부 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성에 대해 대충 파악하고 넘어가려는 안이함이다. 심히 걱정스러운 접근 방식이다. 조급함은 쉽사리 급조(急造)로 이어지고 결국 조잡(粗雜)이나 조악(粗惡), 실패로 낙착되기 때문이다. 최근 20~30년 동안만 봐도, 장기간 막대한 세금을 쏟아부었지만 실패로 끝난 국가사업이 적지 않다.

지도자의 책무 중 하나는 무슨 과제든지 사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일이다. 지난(至難)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막상 중차대한 과제나 위기에 부닥치면 조급증에 걸리기 쉽다. 사실 진단과 본질 파악의 어려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전문성과 경험을 두루 갖춘 사람들의 지혜가 결집돼야 한다. 리더십은 강한 의욕을 드러내기에 앞서 그런 전문가들의 자발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집중, 발휘돼야 한다.

새삼스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라’는 속담이 육중한 무게로 다가온다. 아울러, 일의 방향과 추진 속도와 관련하여 “방향을 잘못 잡으면 속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는 간디의 말이 값진 명언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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