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인터뷰] 장애인권법센터 김예원 변호사 "아이 안고 변론하는 것도 '복'이죠"

입력 2019-01-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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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종' 소리 들어도 신경 안 써…당사자 목소리 담길 때 보람 느껴"

법정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변론에 나선 변호사가 있다. 친모 동거남의 무차별 폭행으로 한쪽 눈을 실명해 영구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동(5)을 변호할 때는 판사 앞에서 직접 자신의 인공 안구를 빼 보이며 "법정 최고형을 내려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비영리 1인 법률사무소인 '장애인권법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예원(37·사법연수원 41기) 변호사의 이야기다. 장애인권법센터는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 5층에 있는 비영리기구다. 인터뷰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무료로 제공해준 덕분에 김 변호사는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피해를 당하고도 도움받기 힘든 발달장애인, 장애아동, 장애여성 등을 위한 무료 법률지원을 하고 있다.

▲비영리 1인 법률사무소 장애인권법센터의 김예원 변호사가 서울 서초구 변호사교육문화관 내 센터 사무실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story@

김 변호사 역시 장애인이다. 의료사고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어 의안(義眼)을 갖게 됐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의 법학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졸업 후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며 2년 반의 시간을 보낸 끝에 법조인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장애인 인권 변호사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2009년 사법 고시에 합격한 그는 2012년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만든 공익재단 동천에 들어가 장애인 인권침해 사건을 대리하면서 이 길로 들어섰다. 연수원에서 동기들과 공익법률기금 운동을 한 게 가장 큰 계기가 됐다. 이후 2014년부터 3년간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 상임변호사로 근무한 후 2017년 1월 장애인권법센터를 설립했다.

"거창하게 각오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시험해보고 싶었어요. 누구에게 보이는 각오가 아니라 이렇게 해서도 변호사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도 싶었고요."

◇ 법정서 모유 먹이며 변론…판사가 던진 "누구세요?"

"갓난아이를 안고 법정에 간 이유요? 특별한 결심을 한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피해자를 지원하려면 재판에 나가야 해요. 공판에 출석하지 않으면 조서에 써진 대로 상황을 파악해야 하거든요. 재판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고, 저쪽에서 뭐라고 변명했고, 재판 방향이 왜 이렇게 됐는지 직접 듣지 않으면 시원하게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갓난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매달고 간 거예요."

김 변호사는 세 아이의 엄마다. 생후 50일이 갓 지난 셋째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법정에서 변론해 화제를 모은 인물이다. 그는 "형사재판은 피해자 대리인의 일정까지 고려해 재판 날짜를 잡지 않는다"며 "애를 낳았으니 기일을 넉넉하게 잡아달라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설명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그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만 수차례 되풀이했다.

올해 일곱 살이 된 첫째 딸부터 재판에 데리고 다녔던 것은 아니다. 첫째 아이는 생후 82일이 되던 날부터 영·유아 보육시설에 '전일제'로 맡겨졌다. 그는 자신의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거리를 가리키며, "82일 되는 아가는 딱 요만해요"라고 말했다. 한 뼘 조금 넘는 크기. 그때는 몰랐다. 주변에서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극심한 불안감을 느껴서일까. 그날 아이는 초록색 변을 여덟 번이나 쌌다.

▲김 변호사는 어릴적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현재 그는 장애인 인권 침해 사건의 해결과 권리증진에 헌신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story@

"아이를 어린이집 바닥에 딱 내려놓는데, 애 눈동자가 불안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저는 몰랐어요. '잘 있어. 이따가 올게. 안녕'이라고 말하고 나왔죠. 적응 기간을 둬야 했는데, 전일로 맡기고 출근해버린 거죠. 갑자기 엄마 냄새도 안 나고, 엄마 소리도 안 들리니까 아이는 몹시 불안했나 봐요. 지금도 많이 후회되고, 아이한테 미안해요."

서울시 장애인인권센터에서 일할 때 태어난 둘째 아이는 6개월간 육아휴직을 하고 돌봤다. 첫째 아이를 키우며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다. '자영업자' 신분이 된 그는 육아휴직을 할 수 없다. 셋째 아이는 '어쩔 수 없이' 젖을 물린 채 법정에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법정에 셋째를 데리고 들어갔어요. 법정 경위에게는 변호사 신분증을 보여주며 제가 피해자 대리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왔죠. 하지만 판사님은 비공개 재판에 애기 안은 엄마가 들어와 있으니 법정 경위를 뚫고 들어왔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누구세요?'라고 물으셨어요. 약간 뜨악하셨을 것 같긴 한데, 이해해주셨어요."

수많은 여성 변호사들이 김 변호사의 행동에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말한다. 애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김 변호사처럼 애를 둘러업고 재판정에 가야 할지 수없이 고민해온 이들이다. 자신은 하지 못했던 선택을 김 변호사가 해내는 것을 보며 "통쾌했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하지만 세간의 칭찬이 그에게는 어색하기만 하다. "대단하다"는 말에도 김 변호사는 "저는 재밌으려고 이러고 살고 있다"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 "취미는 집안일"…주말·밤낮없지만 행복한 이유

김 변호사의 하루는 24시간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그에게 주말은 휴일이 아닌,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워킹맘과는 조금 다른 생활이다. 스위치 온, 오프 없이 24시간 병행체제로 육아와 양육을 병행하고 있지만, 힘든 줄도 모른다. 오히려 시간 조절이 가능한 덕분에 아이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예원 변호사와 세 아이의 모습. 김 변호사는 사건을 위해 현장을 다니는 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병행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는 "요즘도 급하면 셋째 아이를 안고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다.(사진제공=김예원 변호사)

"제가 어떤 조직에 들어가 있으면 일하는 시간 동안은 아예 아이 얼굴을 볼 생각도 하지 못할 거예요. 출장을 가거나 밤에 야근하는 것도 정형화 돼 있잖아요. 물론 저는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낮에 아이들과 의미 있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 당일도 그는 첫째 아이와 특별한 외출에 나설 계획을 하고 있었다. 새롭게 가게 될 유치원 옷을 맞추기 위해 구민체육센터를 방문하기 이전에 아이와 보육시설에 방문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지적장애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아이를 출산했는데 받아주는 곳이 없자, 김 변호사가 수백 통의 전화로 뚫어낸 쉼터다.

"세 아이가 제 욕심 때문에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도 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제 일터에 대해 궁금함을 표현해요. 그럼 함께 보고 설명하죠. '행복하게 자라야 할 이유가 있는 아이들'이라고요. 그게 아이한테 나쁜 건가요?"

김 변호사의 취미는 집안일이다. 단순한 원리다. 15분만 투자하면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가 해결되고, 청소기를 3분만 돌리면 집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이 해결되는 것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주로 집에서 일하는 그는 아이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으면, 한편에서 서면을 쓰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국을 끓이고, 이메일을 보내고 빨래를 개는 게 일과다.

"여기서 발생했던 긴장은 다른 것으로 풀면서 상쇄하는 거예요. 운동은 따로 할 필요가 없어요. 경찰서도 가고 재판, 시설도 가다 보면 하루에 2만 보는 걷거든요. 주변에서 '너 사는 것만 봐도 숨이 막힌다'라는 말을 하세요. 저는 빨래가 취미고, 쉬는 시간인 걸요."

사법연수원 동기로 만난 남편(강지성 서울북부지법 판사)의 지지 덕분에 하고 싶은 변론도 할 수 있었다고 김 변호사는 말했다. 남편과 자신의 수입의 10~20%는 기부를 하고 있다. 현재 고정적으로 기부하는 단체만 40여 개. 갑작스럽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써야 할 돈도 때로 빼놓는다.

"저희 신랑은 한결같아요. 그게 옳은 방향이면 가자고 해요. 돈을 받고 한다는 게 그릇된 방향이라는 게 아니에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은 돈이 없어서 부당한 일을 당했는데도 도움 받지 못하는 중증의 장애인이나 아동에게 도움을 주는 거잖아요. 엄청 정의롭거나 대단한 일까진 아니어도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것에서 충분히 동의가 됐습니다."

▲김 변호사는 남편과 자신의 수입의 10~20%를 고정적으로 기부하고 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이가 생기면 종종 남편과 가족회의를 열고 상의하고 있다. 오승현 기자 story@

◇ '피해자 해결사' 아닌 '도구'…"함께 해서 가능했다"

그는 공익 변호사 활동을 하며 1000건 넘는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 시각장애인도 1종 운전면허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끌어내는 것을 비롯해 잘못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많은 제도 개선 활동을 장애인, 아동 등 단체들과 함께 한다"며 "저 혼자 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지난해 3월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곽정숙 인권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고 곽정숙 전 의원은 장애인 인권 활동가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맞서 권익 보호 운동을 펼쳤다. 같은 해 4월에는 서울시 복지상 대상을 받았다.

그는 2017년 7월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진행된 한 재판에서 자신의 오른쪽 눈의 '인공 안구'를 꺼내기도 했다. 재판부가 놀랄 수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했다. 5살 아이가 친모 동거남의 무차별 폭행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분노케 했다. 당당한 성격을 가진 그도 어린 시절 '개눈깔'이라는 놀림을 평생 상처로 안고 살고 있다. 아직 어린 아이가 그 아픔을 감당할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고, 재판부를 향해 "법정 최고형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거남은 징역 18년, 폭행을 방치한 친모는 징역 6년의 중형을 각각 선고 받았다.

김 변호사는 자신이 장애인들을 위한 '해결사'가 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고 말했다. "저는 피해자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할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요.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같이 공감해야 나설 수 있는 게 법률지원이에요. 당사자가 잘못된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을 때 가장 울림이 있거든요. 저는 도구이자 통로 역할을 할 뿐입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충분히 들어갔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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