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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 시선] 새해 덕담
입력 2019-01-17 05:00   수정 2019-01-20 15:51
시인, 인문학 저술가

▲장석주/ 시인 [오랫동안]/ 스튜디오/2012.02.07/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새해에 지인들에게서 연하장 대신 SNS로 덕담 인사를 받았다. 이는 예전과 달라진 풍습이다. 덕담 중에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거나 ‘새해에 원하시는 모든 일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라는 내용이 많았다. 새해에 이런 덕담을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풍속이다. 우리는 왜 새해를 맞으며 이런 덕담을 나누는가? 누군가 내게 건넨 새해 덕담은 원하는 것을 이루면서 더 행복해지라는 축원이다.

그런 덕담에 마음이 훈훈해지고 감사함을 느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았다. 이루고자 하는 것, 갖고자 하는 것, 되고자 하는 것, 이 모든 일은 인간 내면에 일렁이는 갈망, 소망, 욕망과 관련이 있다. 무엇을 갖고 싶거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다 욕망과 욕구에 포섭되는 일이다. 우리는 더 좋은 직장과 집과 자동차를 원하고, 멋진 옷과 가구와 첨단 가전제품을 원한다. 돈을 버는 이유도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와 명예를 갈망하고, 또한 갈망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한마디로 사람은 욕망하는 존재다. 인간의 역사와 욕망의 역사는 그 시작점이 동일하다. 욕망 그 자체는 나쁜 게 아니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갖고 싶은 걸 갖고,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무슨 잘못인가! 우리는 날마다 욕망과 욕구에 부응하는 활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면에서 인간 욕망은 삶을 향상시키는 원동력이고, 자아 확장과 삶의 부피를 키우는 계기를 만들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도록 채찍질한다. 하지만 욕망은 창조와 파괴 양면으로 작용하는 힘을 다 함께 갖고 있다. 욕망은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나쁜 사람으로 전락시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의범절이라는 것은 욕망의 직접성을 감추고 에돌아가는 전략이고, 법과 규범들은 타인의 이익과 권리를 침해하는 욕망을 강제하는 사회적 합의이다.

자기 내면의 필요에서 빚어지거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알려진 욕망이 사실은 타인의 욕망을 베낀 것이라는 르네 지라르가 주창한 모방 욕망 이론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그 모방 이론을 임상 심리 분석에 도입한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장-미셸 우구를리앙의 ‘욕망의 탄생’을 새해 들어서 읽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타인 속으로 녹아들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의 존재와 그 빛나는 아우라와 그의 멋진 자율성의 비밀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내 욕망은 항상 타인의 욕망을 베낀 것이다! 장-미셸 우구를리앙은 그 연장선에서 “타인들이 관통해 지나가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주조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기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가 타인의 말과 생각과 옷차림을 닮으려는 것은 타인이 가진 매력 자본을 선망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명성, 아름다움, 덕성 따위를 선망하고, 그의 매력과 장점에 감탄하면서 모방하고 욕망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렇듯 인간 욕망은 타인에 의해 중개된 욕망을 받아들인 결과물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자기 욕망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기원이 타인이라는 점을 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할 수 없다면/내가 해야 할 일은/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하지 않는 것.//그 둘이 같지는 않지만/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최선의 일.//내가 원하는 것을/가질 수 없다면/내가 해야 할 일은/이미 갖고 있는 것을/원하는 일./그리고 아직 원할 것이/더 남아 있다는 사실에/만족하는 일.//내가 가야만 하는 곳에/갈 수 없을 때/비록 나란히 가거나/옆으로 간다 할지라도/그저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을/따라갈 뿐.//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표현할 수 없을 때/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느끼려고/나는 노력한다./그 둘이 같지 않다는 것을/나는 안다./그러나 그것이 왜 인간만이/수많은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우는 법을 배우는가의 이유이다.”(니키 지오바니, ‘선택’)

앞서 말했듯이 욕망은 인간 본질의 일면이다. 그러나 욕망에 집착하고 극단화될 때 부작용과 병리적 현상들이 나타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고, 욕망하는 것 모두를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지혜는, 미국의 시인 니키 지오반니(1943~ )에 따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면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원할 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는 일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욕망은 타인을 자극하고 끌어당기는 메커니즘 속에서 움직인다. 욕망에는 미묘한 자성(磁性)이 있기 때문이다. 한 개별자의 욕망은 이러한 자성으로 사회적 관계망을 타고 널리 퍼져나간다. 문제는 욕망의 거듭되는 좌절과 실패에서 시작한다. 욕망의 실현이 꺾일 때 더러는 살인이나 폭력 같은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 욕망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그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제 안에서 자라나면 욕망이 망동(妄動)으로 분출하면서 그 파괴성을 드러내고야 만다. 욕망의 고삐를 죄고 그것을 부려라. 그렇지 않으면 욕망이 당신의 고삐를 죄고 당신을 부릴 테니!

우리에게 지속성과 정체성을 이루는 자아라는 것 역시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은 자아를 빚고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빚는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타인과의 관계 속에 내던져져서 자기 실존을 꾸린다. 타인과의 관계라는 것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욕망의 관계이다. 사람은 욕망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욕망의 존재로 길러진다는 뜻이다. 저마다의 삶은 욕망이 만든 무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500년 전 부처는 오랜 명상과 수행 끝에 제자들에게 존재와 사물의 덧없음(諸行無常)과 더불어 인생은 고(苦)라고 갈파했다. “태어나는 것도 고요, 늙는 것도 고요, 병드는 것도 고요, 근심, 슬픔, 괴로움, 걱정, 번뇌도 고다.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하는 것도 고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도 고다.” 태어남, 병듦, 죽음, 싫어하는 것과 부딪침, 좋아하는 것과 헤어짐,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다 괴로움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괴로움은 인생의 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고통의 뿌리는 갈애(渴愛),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에 닿아 있다. 부처는 그 고통과 번뇌를 소멸시키고 욕망의 아수라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라고 했다. 불교에서 하는 수행의 최종 목적은 해탈이다.

젊은 시절엔 무분별한 욕망을 품고 뜨겁게 약동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나이 들면 욕망의 불꽃은 잦아든다. 나이 들어 경험치가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완숙 경험(mastery experience)’을 통해 지혜를 얻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면 삶은 끔찍하고 누추해진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새해엔 욕망을 덜어내는 노력을 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욕망을 버리고 더 많이 비우자. 과일나무도 열매를 솎아줘야 남은 열매가 실해지는 법이다. 비움은 더 많은 가능성의 영역을 연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건 아주 단순한 진리다. 이미 가득 차 있는 자는 그 무엇도 채울 수 없다. 우리가 생활에서 실천하는 비움은 인생의 다이어트이고, 욕망의 다운사이징이며, 마음의 고요와 안녕을 얻기 위한 작은 해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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