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알다가도 모를 법원

입력 2019-01-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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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슬 사회경제부 기자

“피고인은 도주의 우려가 있어 법정구속합니다.”

재판장이 실형이 선고된 피고인을 법정구속할 때 쓰는 단골 멘트다. 어쩌면 실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종의 ‘통과 의례’일 지도 모른다. 2000만 원의 사기로 고작 몇 개월의 실형이 선고된 사람도 구속되는 마당에 법정구속을 피해갈 용자가 몇이나 될까.

가끔, 용케 구속을 피해 가는 이들도 있다. 최근 후배 검사를 성추행한 전직 검사가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법정구속될 줄 알았던 그에게 재판부는 의외의 말을 남겼다. “도망의 염려가 없고,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를 위해 법정구속은 하지 않겠다.”

뒤이은 재판에선 남학생이 성범죄로 징역 1년 8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도망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구속됐다. 재판부는 무얼 기준으로 도망의 우려를 달리 판단했을까. 한 사람에겐 방어권이 필요하고, 또 다른 사람에겐 방어권이 필요치 않았던 걸까. 전직 검사와 학생이라는 신분의 차이에서 비롯된 판단은 아니었을까. 혹은 두 사람의 속마음이라도 읽은 것일까.

문득 한 부장판사의 말이 떠올랐다. 판사 생활만 30년째인 그는 “실형이 선고되면 누구든지 다 도망가고 싶어 한다”며 “대부분 실형과 함께 법정구속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남녀노소, 직업, 범죄 종류 등 그 모든 것을 불문하고 구속을 피하고 싶은 건 매한가지라는 의미였다.

이 학생의 혐의점이 전직 검사에 비해 무겁긴 하지만 혐의 자체가 도망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해서 덜 도망가고 싶은 것은 아니고, 죄질이 좀 더 불량하다고 해서 더 도망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전직 검사라고 해서 학생보다 구속에 더 무덤덤한 것 또한 아닐 것이다.

어디 이뿐일까. 전직 국정원 국장과 전직 은행장을 ‘도망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법정구속하면서 징역 2년을 선고 받은 기업인을 구속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도망의 우려를 판가름하는 데 있어서 법원 나름의 기준이 있겠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기준이다.

간혹 재판을 듣다 보면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표현을 종종 듣는다. 거꾸로 법원에 묻고 싶다. “도망의 우려,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 증명됐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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